황혼의 길목에 찾아온 이별

가사소송 2012. 8. 14. 13:29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아마도 작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올해만큼은 아니지만 작년의 8월도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더웠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쏟아지는 한여름 재판을 마치고 사무실에 땀에 젖어 축 늘어져 있을 때 70대가 넘어 보이는 단아한 모습의 할머니 한분이 찾아왔다.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법률상담 받기를 원하는 할머니가 있다고 소개를 받았는데, 그 할머니께서 찾아오신 거였다. 우선 할머니를 상담실로 모셨다. 할머니께 어떠한 일로 상담받기를 원하시냐고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한참을 망설이시더니, 지금까지 수십 년을 함께 해온 남편과 이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단아하신 할머니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다소 놀랐다. 왠지 세상의 풍파를 겪지 않고 곱게 늙으셨을 것 같은 할머니의 모습에서 이혼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할머니의 의사는 단호해보였다. 그래서 할머니께 수십 년 동안 남편과 함께 해오시다가 왜 이제야 이혼을 결심하셨냐고 물어보았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요즘 증가하고 있는 전형적인 황혼이혼이였다. 남편은 한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남편은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사업의 성공으로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자식과 할머니에게 선물하였지만, 가부장적인 행태로 할머니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아니하였고, 젊은 시절에는 바람도 피웠다. 할머니는 남편의 그러한 태도를 인내하며 살았다. 그러나 남편의 가부장적인 태도는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아니하였고, 심지어 술을 마시면 폭력까지 행사했다.

  이에 할머니는 10여 년 전 부터 자식들이 장성하여 결혼을 마치면 이혼을 하리라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막내딸이 마지막으로 결혼을 하였고, 할머니는 마침내 이혼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할머니의 사연을 한참 들었다. 누가 할머니의 황혼에 결심한 이별 준비를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혼소송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법정에서 서로의 상처를 들추어내어 잊고 싶었던 아픔을 공개하며 그로인한 갈등의 폭은 깊어만 간다. 이러한 이혼소송의 고통을 할머니께 설명하며 상담 등을 통하여 남편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떻겠냐며 나는 할머니의 이혼소송을 막으려했다. 이혼소송 진행과정에서 겪을 할머니의 심적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이혼의사는 확고부동이었다. 그러한 할머니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었고, 결국 이혼소송을 진행했다. 할머니의 이혼소송은 예상했던 만큼 법정에서 서로의 잊고 싶은 상처, 아픔을 끄집어내며 진행되었다. 더욱이 가슴이 아픈 것은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두고 둘러싼 자녀들의 다툼이었다. 자녀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할머니와 남편의 편으로 나누어져 소송의 당사자인 할머니와 남편보다 더 심하게 다투었다. 할머니의 이혼소송으로 그나마 단란했던 자식들의 사이도 이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된 것이다.

  소송을 진행하면서 누구를 위한 이혼소송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화목했던 자녀들은 재산문제로 인하여 이제는 원수가 되어있는 상황이고, 할머니와 그 남편은 법정에서 끄집어진 아픈 상처에 눈물을 흘리울 뿐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한가운데서 수많은 고통들이 찾아오지만 가족으로부터 오는 배신과 아픔은 그 어떠한 고통보다 참혹한 것이다.

 가족 간의 더 이상의 상처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조정기일을 요청하였고 수차례의 조정을 통하여 이혼절차는 더 이상의 상처 없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할머니와 그 남편. 자식들 간의 갈등은 쉽사리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절차가 마무리되자 할머니는 홀가분하다고 하였다. 수십 년 동안 남편의 폭압에 시달려온 자신에게 이제 자유를 주고 싶다고 하셨다.

 언론에서 수년전부터 밝힌 것처럼 최근 황혼 이혼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가부장적 질서에서 벗어나면서 그 동안 억압되어 왔던 여성이 이러한 억압된 상황을 수인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혼소송은 지루하게 진행이 되고, 서로의 상처를 끄집어내야만 하기에 서로를 힘들게 한다. 시대는 변했는데 여전히 가부장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남편들은 변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하지 못한 아내의 이혼통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혼은 신중해야만 한다. 이혼소송의 과정에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혼에 앞서 심리전문가, 가정문제 전문가 등의 상담을 통해 서로의 갈등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해결하는 방안을 우선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황혼의 길목에 아픈 생채기를 남기는 것은 서로에게 큰 슬픔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해행위 취소소송의 쟁점들

민법여행 2012. 8. 8. 10: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가. 채권자 취소권의 의의 및 요건

1) 채권자 취소권이란 채무자가 채권자를 해함을 알면서 자기의 일반재산을 감소시키는 법률행위를 한 경우에 채권자가 그 법률행위를 취소하고 재산을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리를 말합니다.(민법 제406조 제1항)

2) 채권자 취소권의 행사요건으로서는 ① 피보전채권의 존재, ② 채무자의 사해행위, ③ 채무자의 사해의사, ④ 수익자(또는 전득자)의 사해의사, ⑤ 제척기간(채권자가 취소원인을 안 날로부터 1년, 법률행위 있은 날로부터 5년 내)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나. 피보전채권의 고도의 개연성

1) 채권자취소권에 의하여 보호될 수 있는 채권은 원칙적으로 사해행위라고 볼 수 있는 행위가 행하여지기 전에 발생된 것임을 요하지만 그 사해행위 당시에 이미 채권 성립의 기초가 되는 법률관계가 발생되어 있고, 가까운 장래에 그 법률관계에 터 잡아 채권이 성립되리라는 점에 대한 고도의 개연성이 있으며, 실제로 가까운 장래에 그 개연성이 현실화되어 채권이 성립된 경우에는 그 채권도 채권자취소권의 피보전채권이 될 수 있습니다( 대법원 2001. 3. 23. 선고 2000다37821 판결 등 참조).

2) 통상 사해행위취소송에서 피보전채권과 사해행위의 시간적 간격이 1년 이상 벌어지면 패소 가능성이 상당히 높고, 7개월 정도이면 승소가능성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다툼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다. 채무자의 사해행위 및 사해의사

1) 사해행위란 채무자가 행한 재산상의 법률행위 결과 그의 재산이 감소하여 채권자가 충분히 채권을 만족을 받을 수 없게 될 염려가 있게 되는 행위를 말하는데, 결국 사해행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채무자의 재산상의 법률행위로 말미암아 채무자의 총재산의 감소가 초래되어 채권의 공동담보에 부족이 생기게 되는 것, 즉 채무초과상태에 이르거나 이미 채무초과상태가 심화되어야 하는바, 일반적으로 채무자의 재산처분행위가 사해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채무자의 총재산의 감소가 초래되어 채권의 공동담보에 부족이 생기게 되는 것, 즉 채무자의 소극재산이 적극재산보다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2) 대법원은 ‘채무자가 채무 있음을 알면서 자기의 유일한 재산인 부동산을 매각하여 소비하기 쉬운 금전으로 바꾸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사해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하고 있는바, 사안의 경우 채무자에게 이 사건 부동산 외에는 다른 부동산이 없다면, 위 처분행위로 말미암아 일반재산의 감소가 초래되고 필연적으로 채권의 공동담보에 부족이 생기게 되어 결국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한 구상채권의 변제를 받을 수 없게 되는 만큼, 채무자의 위 처분행위는 채권자인 귀 재단을 해하는 법률행위로서 사해행위라 판단될 수 있습니다.

라. 수익자의 사해의사

1) 사해행위취소소송에 있어서 수익자가 사해행위임을 몰랐다는 사실은 그 수익자 자신에게 입증책임이 있는 것이고, 이때 그 사해행위 당시 수익자가 선의였음을 인정함에 있어서는 객관적이고도 납득할 만한 증거자료 등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고, 채무자의 일방적인 진술이나 제3자의 추측에 불과한 진술 등에만 터 잡아 그 사해행위 당시 수익자가 선의였다고 선뜻 단정하여서는 안된다고 할 것입니다(대법원 2006. 4. 14. 선고 2006다5710 판결, 대법원 2006. 7. 4. 선고 2004다61280 판결 등 참조).

2) 위와 같이 채무자의 사해의사가 인정되는 이상 수익자의 사해의사는 추정된다고 할 것이나, 수익자가 채무자와 평소 친․인척이나 특별한 친분관계가 없고, 그 밖에 채무자와 특별한 거래관계에 있지 아니하여 채무자의 악화된 재정상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부동산 공인중개사가 입회하여 이 사건 부동산에 대한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는 점 등을 입증하면 그 악의의 추정이 복멸될 수 있습니다.

  상담 전화 : 010 3146 9735,  채희상 변호사, 법률사무소 진실

투자 사기의 무혐의 처분

승소판결 2012. 8. 7. 22:42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1. 사안의 개요(사건번호 : 2012 형제 3xxx 사기)

 고소인들은 피의자가 처음부터 사업을 진행할 의사나 능력도 없이 고소인들을 기망하여 수억원원의 금원을 편취하였다며 피의자를 사기죄로 형사 고소하였다. 이에 피의자는 당 법무법인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며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였다.

2. 사업의 실질적인 진행

  그러나 피의자와 상담결과 실질적으로 사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즉 피의자는 이 사건 사업에 상당부분의 기술력을 확보하여 각 거래처와 물품 판매를 위한 교섭이 상당부분 진행되었고, 이와 관련된 각 물품판매 내역, 계약서 등이 작성되었는바 이러한 증거를 첨부하여 사업이 실질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의견서를 빠른 시일에 작성하여 경찰 및 검찰에 제출하였다.

  더불어 회계장부를 분석하여 투자금의 대부분이 사업진행비용으로 사용된 사실을 밝혀냈다.

3. 고소인들의 사업 관여

애초에 고소인들은 사업이 진행된 사실이 없고, 피의자가 사업을 진행할 의사나 능력도 없이 고소인들을 기망하여 금원을 편취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회사의 업무일지, 인사관련 서류 등을 분석한 결과 고소인들이 회사의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업에 깊숙히 관여한 사실을 밝혀 낼 수 있었다.

4. 검찰 피의자 신문 과정에 변호인 참석하여 적극적으로 방어권 행사

 검찰 피의자 신문은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강도 높게 실시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변호인의 동반이 없는 경우 자칫 피의자는 긴장하여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거나,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하여 억울한 일이 발생할 여지가 크다. 따라서 피의자 신문과정에 단지 변호인이 참석해주는 것 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검찰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고소인과의 대질이 이루어 졌는데, 고소인은 역시 일방적인 주장을 하였고 이에 변호인은 고소인의 사업 진행에 깊숙히 관여한 사실, 자금이 대부분 사업진행비로 쓰인 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출하며 고소인 진술의 모순점을 해명하였다.

5, 무혐의 처분

본 사건의 변호인은 위와 같이 피의자가 적극적으로 사업을 진행하였고, 고소인들이 회사의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업에 깊숙히 관여한 점, 투자금이 대부분 사업진행 비용으로 사용된 점 등을 입증하여 피의자가 고소인들을 기망한 사실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검찰은 피의자에 대하여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상담 전화 : 010 3146 9735,  채희상 변호사, 법률사무소 진실

법원은 휴식중......

좌충우돌변호사일기 2012. 8. 7.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법원은 7월말에서 8월 초까지 약 2주간의 휴정기를 갔는다. 이 기간 동안 판사 및 법원 공무원이 휴가를 가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맞추어 변호사들도 여름휴가를 떠난다. 드디어 변호사들이 꿈꾸어 오던 법원 휴정기기 시작되었다. 올해는 7월 30일부터 8월 11일 까지 약 2주간의 법원 휴정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7월 30일부터 약 일주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1년동안 오직 이 일주일간의 휴가만을 기대하며 살아 온 것처럼 휴가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설레였다. 휴가 일주일 전부터는 다소 나를 짜증스럽게 만드는 의뢰인이 찾아와도 싱글벙글 웃으며 친절하게 상담을 하였고, 촉박하게 재촉하는 의견서를 작성하기 위해 밤 10시가 넘어서 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어도 즐거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휴가 전주 금요일..... 오후 4시 인천재판을 마치고 나는 바로 집으로 고고씽이다. 나를 괴롭히던 두꺼운 사건 기록들이여 이제는 안녕, 이제 너를 다시 보지 않으리.....나에게는 푸르른 제주도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일찍 끝날줄 알았던 인천재판은 뜻밖에 밀려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끝나고, 퇴근시간에 맞추어 서울로 출발하는 나의 애마는 질주본능을 느끼지 못하고 서울로 기어만 간다. 그래도 나는 즐겁다.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휴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오후 8시가 다되어서 집으로 도착, 사랑하는 아내와 10개월 된 딸아이가 나를 반긴다. 이것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이번 휴가는 큰맘먹고 유럽으로 날아가 런던 올림픽의 영웅들도 응원하고 싶었건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원대한 유럽원정의 꿈은 날아가고 제주도로 향했다. 그래도 나는 즐겁다. 푸른 바다의 시원함과, 맛있는 음식들, 시원한 공기가 나를 반겨주었고, 일년동안 쌓여있던 피로가 날아만 가는 것 같았다.

  3박 4일 간의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이제부터 슬슬 다시 사무실에 나가야 할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지옥같은 현실이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아직 여유는 있다. 쇼파에 늘어져 올림픽 경기를 보고,,,졸리면 자고,,,,배고프면 먹고,,,,,, 이 얼마만에 누리는 여유란 말인다. 영원히 이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달콤했던 일주일간의 휴가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월요일 요란스럽게 울리는 핸드폰의 기상소리가 왜이렇게 지옥의 종소리 처럼 느껴지는지....결국 사무실에는 지각을 했고...사무실 책상에는 결제 서류가 산더미 처럼 쌓여 있고, 갑작스럽게 다음주 까지 제출하라는 석명준비명령은 왜 이렇게 많이 날라왔는지,,,아무래도 다음주 광복절에는 출근을 해야만 할 것 같구나....

 나의 일주일의 휴가는 그렇게 꿈처럼 사라져 갔다. 다시 1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우울함의 그림자가 나를 하루종일 짓눌렀던 검은 월요일이다.

 

  6월 들어 너무 바뻐 쉴 틈이 없었다. 평일에는 최소한 11시까지 사무실에서 두꺼운 기록과 씨름하다 녹초가 되어 퇴근, 그래도 일이 밀려 주말에도 출근.......하지만 밀린일의 양은 줄어 들지 않는다. 간신히 재판 기일 전날에 서면을 작성하여 마감에 쫓기는 작가처럼 법정에 당일 제출하는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하루살이 인생같은 느낌이랄까....

  왜 이렇게 바빠진 것일까....그래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사건수를 세워보니..이건 뭥미.....75건......지금까지 내가 담당하고 있는 사건수를 정확히 세어보지 않고 그져  40건이나 50건 사이겠지 하고 추측만 했었는데,,,75건이란다......75건...내가 우리법인 탑이다. 사건 담당수로는.....;; 이제야 내가 그토록 바빠진 이유를 알겠다.....보통 한 변호사당 적절한 사건수는 30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좀 많이 배당받는다 싶으면...40건, 50건.....그러나 난 그 한계치를 뛰어 넘은 75건이란다.........그러니까 당연히 바쁠 수 밖에 없겠지....

당장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머리속에 가득찬 사건들의 향연을 끝내고, 에메랄드 빛 몰디브 해변에 내 몸을 맡기고 싶건만, 난 여전히 날 괴롭히는 사건들과 함께 고통스러운 왈츠를 추고 있다.

  오후에 있는 의정부 재판을 마치고 재빨리 사무실에 들어가 밀린 서면을 쓰려고 했건만, 2시 30분 예정인 재판은 앞에 사건진행이 밀려 3시 20분이 넘어서야 끝나고, 부랴부랴 차를끌로 사무실로 향하였건만,오늘따라 길은 왜 이렇게 막히는 것인가?, 짜증이 밀려오고 내 고운 입속에서 나도 모를 아름다울 쌍욕을 뱉어 낸다. 간신히 사무실 근처에 도착하니 벌써 5시가 다 되어 가고, 몸도 마음도 이미 지쳤다. 일할 의욕도 사라졌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핸들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이번주는 주말에 출근 안할거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물론 다음주 밤을 세워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꿈속에 아름다운 몰디브 해변이 날 맞이해주길 굳게 기원한다. 출렁이는 파도소리에 스르르 잠이 드는 나의 낙원 몰디브여....언제 나의 낙원은 길을 열여 줄 것인가, 저 어둠의 괴물같은 사건들로부터 나를 구원해주길...

고시촌 주거공간의 변천사

고시촌이야기 2012. 2. 10. 10: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는 아직도 수많은 고시생들이 각종 시험을 준비하며 거주하고있다. 고시촌하면 의례 생각나는 부분이 고시원일 것이다. 티비 드라마 등에서 고시생은 항상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고시원의 조그마한 방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낡은 추리닝을 입고 책상에 앉아 두꺼운 이른바 육법 전서를 하루 종일 외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제 신림동 고시촌에서 고시원은 점점 사라져가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시생들을 낡고 허름한 고시원에서 거주하지 않고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는 원룸이나 오피스텔에서 거주한다. 

  신림동 고시촌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인 90년대 중반에만 해도 고시촌에 거주하는 고시생들은 대부분은 하숙집이나 고시원에 거주하였다. 고시원의 경우에는 대부분 방은 규모가 아주 작았고, 화장실이나 샤워 시설은 당연히 공용이었다. 그리고 고시원의 경우 고시원 주인이 고시생을 위한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하숙집이라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한달에 약 30여만원을 내면 밥과 숙식이 제공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고시생들은 항상 공부때문에 체력이 딸리기에 고시원 주인 아주머니들은 고기 등 고열랑 음식을 고시생들에게 수시로 공급해주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고시 공부를 할 생각도 없었고, 법으로 밥을 벌어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시촌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 대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할 때 같이 하숙집에 있었던 형이 갑자기 행시 준비를 하겠다며 신림동 고시촌으로 떠났기 때문에 몇번 그 형이 거주하던 고시원을 찾아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 형을 찾아 가면 고시원 주인집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었던 그런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는 그래도 아직은 인정이 남아 있던 시기이다. 그때는 그렇게 신림동 고시촌에 고시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시기이다.

  더불어 고시촌의 고시원 생활이 답답하다며, 지방의 풍경이 좋은 절을 찾아가 공부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절에는 의례 고시생 몇명씩이 꼭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의 절로 소풍을 갔는데, 고시생 몇명이 어린 여선생님을 보자, 여선생님에게 그렇게 말을 걸려고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는 합격생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즉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인 유명한 절들은 항상 고시생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고시원의 영광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새롭게 유입되는 젊은 고시생들은 풍요로운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지 아니하는 고시원을 선호하지 아니하였고 그들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이른바 원룸형태의 집들을 원했다. 쾌적한 환경을 선호하는 젊은 고시생들의 유입으로 고시원은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고시촌에는 원룸이나 오피스텔 등의 속속 들어섰다. 그리고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각종 시험정보 최신판례 등의 업데이트와 단절된 절도 고시생들이 더이상 찾지 않게되었다.

  원룸형태의 주거공간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의 공간에 방, 화장실,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개인공간과 쾌적함을 중요시하는 고시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아주 작고 협소하기 때문에 이른바 '미니원룸'이라고 불리웠다. 삶이 더 여유로운 고시생들은 근처의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을 전세로 얻어 윤택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고시원은 그렇게 고시촌의 중심적인 주거공간의 위치를 넘겨주고, 신림동 고시촌 산꼭대기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직도 고시원은 고시생들의 유용한 공간이다. 특히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오랜기간 고시준비로 경제적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이른바 장수 고시생들에게는 고시원은 아직도 저렴하게 거주하며 공부할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 신림동 고시촌은 이제 서서히 고시생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법시험은 조만간 사라질 전망이고, 행시나 외시도 그 제도의 변경으로 우리가 불렀던 고시생들의 숫자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신림동 고시촌의 원룸이나 고시원에 거주하는 이들도 고시생에서 저렴하게 방을 잡기를 원하는 직장인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고시촌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신림동 고시촌이라는 이름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후 3시에 서산에서 재판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조정기일이었는데 별다른 성과없이 양측 당사자의 감정의 골만 깊어졌기에 다소 무거운 마음을 안고 버스에 탔다. 피곤함이 몰려와 주변의 풍경을 볼 여유도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버스는 약 2시간여를 달려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른한 몸을 이끌고 버스에 내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에서 대학후배 녀석을 우연히 만났다. 말이 후배이지 9살 정도 차이나는 녀석이었다. 대학 선후배 모임에서 만나서 간간히 연락하던 녀석이었는데, 그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오래간만에 본 것이다.

  녀석은 강남의 어학원으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녀석은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이었다. 이제 취업을 걱정해야 할 나이가 되어서 이른바 스펙관리하느냐고 힘들어 죽겠다고 한다. 학점은 기본적으로 따 놓아야 하고, 토익도 900점이상은 획득해야 그나마 괜찮은 직장에 면접이라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그외에도 각종 자격시험 등을 보아 스펙을 갖출 수 있는 만큼 갖추어 놓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녀석의 한숨은 아무리 스펙을 갖추어 놓아도 녀석이 원하는 이른바 좋은 직장은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청년실업 어느덧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젊은이들이 원하는 고용이 보장되고 적장한 임금이 보장되는 이른바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젊은이들은 취업난의 고통속에 실업자로 내몰린다.

 사회는 점점 좋은 스펙을 요구하고, 얼마 안남은 좋은 일자리를 위해 젊은이들을 경쟁의 굴레로 몰아넣는다. 내가 대학을 다닐때만 해도, 나름대로 대학의 낭만이 있었다. 1.2학년 때에는 마음껏 놀아도 괜찮았다. 선동열의 방어율과 비슷한 학점이 나와 학사경고장이 나와도 대학생활에서 한번쯤은 경험해봐도 되는 그런 것이었다.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을때만 해도 졸업을 앞둔 선배들은 취업이 될까라는 걱정보다는 여러개의 회사 중에 어디로 골라 갈까 하는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그만큼 그 시절은 청년들의 일자리가 보장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IMF가 오고, 무한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평생 보장되었던 평생 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수시로 반복되는 구조조정, 40대만 넘어서도 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고용불안, 값싼 노동력을 선호하는 대기업의 행태로 인한 비정규직의 양산 등으로 젊은이들이 원하는 질 좋은 직장의 수는 줄어만 갔다. 

 국민소득 2만달러가 넘어가고, 무역규모가 1조원 달러를 넘어갔다고 정부에서는 연일 자랑질을 하고 있지만, 국민소득이 채 1만달러가 안되었던, 그러나 아버지의 퇴근길에는 자식을 위한 따스한 치킨이 들려있던 그 시절이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국민소득 2만 달러의 혜택은 몇몇 가진 자에 편중되고, 무역규모 1조 달러의 달콤함은 몇몇 대기업만 누릴 수 있고, 그로인한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개천의 용은 사라졌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어쩌면 아버지가 부유층이 아닌 한 신분의 장벽을 영원히 넘어 설 수 없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88만원 세대라는 비아냥 거림을 들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잃어버린 세대'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다음에 또 보자며 성급히 지하철역에서 내리는 녀석의 축 처진 어깨를 바라보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깊은 한숨과 고뇌를 느낄 수 있기에 집으로 오는 내내 측은함이 들었다.


 
 점심식사 전까지만 해도 즐거운 금요일이었다. 다소 부담스러웠던 오전 재판은 새로운 증
거를 추가하여 밤을 새워 쓴 서면 덕분인지 우리측에게 다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오후에 증인신문이 예정되어 있던 재판은 상대방이 기일변경을 신청해와 한 시름 덜게 되었다.

 이제 점심을 먹고 금요일까지 제출할 의견서의 마무리만 하면 즐거운 주말이 나를 반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의견서를 마무리 짓고 달콤한 커피한잔과 김광석의 애절한 음악을 들으며 오래간만에 감상에 젖어 있는데, 직원이 급작스럽게 들오오더니 내일까지 의견서를 낼 것이 있다며 질의서를 들고 왔다.

내일까지? 그렇다면 오늘 일찍 퇴근하기는 ;;, 그러나 쉬운 의견서일지도 몰라 하며 바라본 질의서, 이런 젠장 기업회생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생소한 분야의 질의서였다.
이런제기랄...어떤 놈이야 나의 소중한 금요을 저녁을 빼앗아 간 질의서를 보낸놈이 라는 욱하는 그 무엇인가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왔다.

 하지만 이성을 찾아야 했다. 적어도 토요일에는 회사에 나와서는 안된다. 나의 소중한 토요일까지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질의서를 읽고 또 읽어 사실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나 답을 내리가가 정말 힘들었다. 왜냐면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니까...;;

  기업회생 관련 서적을 이제 탐독해야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이것 저것 관련 서적을 뒤지고 정리하며 계속 되었고, 어느정도 답을 정리할 수 있겠구나 하니, 벌써 저녁 9시가 넘어갔다. 사무실에는 변호사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적어도 의견서를 던져준 직원은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냐 라고 투덜대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타 마셨다. 달콤하게만 느껴졌던 커피가 이제는 왜 이렇게 쓰게 느껴질까....

자료를 정리하고 이제 의견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자료를 대충 정리하고, 초안을 짜 놓았으니 금방 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견서를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고 또 다시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며 해결책을 찾아내고 하며 의견서를 완성하니 시계의 시침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의견서를 메일로 관련 기관에 보내고 긴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향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김광석의 마지막 앨범에 실렸단 '부치지 않은 편지'를 볼륨을 크게 하여 틀어놓고 목이터져라 따라 불렀다. 내 소중한 금요일 저녁을  빼앗아간 얄미운 의견서, 김광석의 노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처량하고 슬프게 들리는 것일까? 야근없는 유토피아 같은 직장은 없는 것일까? 이럴때 개업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은 요즘 어려운 법률시장에 회사에서 안 짤리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숨죽이고 살아야만 할 뿐;; 그래도 나에게는 소중한 토요일, 일요일이 보장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시촌 입성기(고시촌 탈출기 1)

좌충우돌고시촌탈출기 2012. 2. 4.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서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였다. 비록 법학을 전공하기는 하였지만 나는 법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 보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학 1학년때 처음 접한 민법총칙은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 외계어 같은 각종 법률용어, 이론 등은 아 내가 괜히 법학을 전공했구나 하는 충격을 주었고 나는 1학년을 마치고 즉시 군대로 도피를 택했다. 그만큼 법학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강릉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열심히 싸우고, 제대를 하고 보니 대한민국은 듣지못했던 외환위기로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고, 평생 고용이 보장되었던 직장은 이제 실업자를 양산하며 수많은 가장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시골에서 힘겹게 자식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난 안정적인 무엇인가를 해야했고, 그렇게 택한 것이 결국 적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법시험 준비였다.

  그러나 쉽게 고시공부를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난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에 취해 신나게 거래에서 친구들과 "대한민국"을 외친 후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조용히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림2동 산꼭대기에 위치한 조용한 원룸에 정착했다. 그때가 아마도 2002년 가을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혼자 조용히 입성한 고시촌은 나에게 어색했고 쓸쓸했다. 생전 처음 고시식당에서 아무도 모르는 이들과 섞여 혼자 밥을 먹는 것이 가장 어색했고, 독서실에서 하루 종일 법서를 바라보는 것도 민법총칙의 충격에 군대로 도피했던 나에게는 신기하리 만큼 어색했다. 독서실 책상에 조용히 공부해달라며 음료수 하나와 메모지를 받은 것도 어색했다. 그러나 가장 어색한 것은 하루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 고립무원의 무인도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때였다.


쓸쓸함, 독서실에서 힘겨운 공부를 마치고 달빛을 조명삼아 산꼭대기 원룸을 꾸역꾸역 올라 갈때는 쓸쓸함을 넘어서는 표현할 수 없는 처량함이 밀려들어 왔다. 고시촌에서의 몇달의 생활을 통하여 수시로 받는 조용히 해달라는 메모지, 고시식당에서의 어색한 식사 등 등이 익숙해졌지만, 쓸쓸함과 외로움은 여전히 어색한 친구였다.

  더욱 나를 당황시키는 것은 역시 법학이라는 과목에서 오는 어색함이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니 모든 것들이 구멍이었다. 민법은 여전히 외계어처럼 들려오고, 형법총칙의 이론들은 내가 법을 공부하는 것인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했다.

 그러나 신림동 고시촌에 꿈을 품고 입성한 이상, 즉 사나이가 칼을 뽑은 이상 무라도 썰어야했다. 어떻게 해서든 1년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밤공부를 마치고 원룸에 돌아와 창문을 열면 신림동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 이곳을 내가 벗어 날 수 있을지, 아니면 패배자가 되어 쓸쓸히 퇴장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난 과연 신림동 고시촌을 탈출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의 신림동 고시촌 생활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법불신의 시대를 살고있다.

시사비평 2012. 1. 28. 09: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영화 도가니에 이어서 부러진 화살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부러진 화살은 흥행에 성공하며 일반 대중에게 법원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고 어필하고 있다.

 

 우리는 사법불신의 시대를 살고 있다. 법원 앞에는 연일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판결을 한 판사의 이름을 공포스러운 빨간 글씨로 적어 1인 시위를 하고 있고,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의 판결의 결과에는 이념적 성향에  따라 정의롭지 못한 판결이라며 사법부를 비판하고, 심지어는 판사의 집앞에서 날계란을 던지며 항의하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법부를 비판한다.

  영화 부러진 화살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직설적으로 사법부의 판단이 잘못됬으며, 정의롭지 못한 판결로 선량한 시민이 희생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 사법불신의 시대를 초래한 것일까?

  대중들의 법조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판사의 판결은 정의롭지 못하며, 검사는 권력에 아부하는  집단이며, 변호사는 돈만 밝히는 수전노 같은 존재이다. 대중들에게 법조인 및 사법부는 항상 개혁의 대상이며, 때로는 타도의 대상이기도 하다. 

  자업자득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선배 법조인들은 과거 군사 독재시절 그들의 눈치를 보며 정의롭지 못한 판결을 내린 것이 사실이었고, 변호사는 의뢰인이 고액의 수임료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진행 과정 내내 변호사 얼굴 한번 볼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과거 다소 무지했던 대중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그려러니 하고 넘어갔지만 투철한 시민의식으로 무장된 대중들은 이제 과거의 무지했던 그들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각인된 사법불신을 깨트리기는 너무나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법조비리 사건이 종종 터질때마다 사법불신을 종식시킬 개혁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유아무야 넘기며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렸고, 대중의 기대는 실망감을 넘어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한 대중들은 이제 양치기 소년이 되어 버리는 사법개혁을 믿지 않는다.

 그러한 대중의 좌절감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마른 사막의 모래땅을 옥토로 만든다는 각오로 이제라도 정의의 칼을 들어야 할 때이다. 법원은 누가 보아도 신뢰할 수 있는 판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대중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른바 전관예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나와야 할 것이고, 나와 같은 변호사들은 보다 낮은 자세로 의뢰인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대중은 법이 정의롭고 만인에게 공평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법은 항상 가진자에게 유리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가혹하다고 여긴다. 탈주범 지강헌이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외침은 아직도 대중들에게 진실로 다가온다.
 
   법은 공평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진리를 지키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가야만 한다. 진리의 고된 행군을,  그래야만 대중들의 뿌리깊은 사법불신의 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