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휴식중......

좌충우돌변호사일기 2012. 8. 7.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법원은 7월말에서 8월 초까지 약 2주간의 휴정기를 갔는다. 이 기간 동안 판사 및 법원 공무원이 휴가를 가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맞추어 변호사들도 여름휴가를 떠난다. 드디어 변호사들이 꿈꾸어 오던 법원 휴정기기 시작되었다. 올해는 7월 30일부터 8월 11일 까지 약 2주간의 법원 휴정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7월 30일부터 약 일주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1년동안 오직 이 일주일간의 휴가만을 기대하며 살아 온 것처럼 휴가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설레였다. 휴가 일주일 전부터는 다소 나를 짜증스럽게 만드는 의뢰인이 찾아와도 싱글벙글 웃으며 친절하게 상담을 하였고, 촉박하게 재촉하는 의견서를 작성하기 위해 밤 10시가 넘어서 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어도 즐거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휴가 전주 금요일..... 오후 4시 인천재판을 마치고 나는 바로 집으로 고고씽이다. 나를 괴롭히던 두꺼운 사건 기록들이여 이제는 안녕, 이제 너를 다시 보지 않으리.....나에게는 푸르른 제주도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일찍 끝날줄 알았던 인천재판은 뜻밖에 밀려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끝나고, 퇴근시간에 맞추어 서울로 출발하는 나의 애마는 질주본능을 느끼지 못하고 서울로 기어만 간다. 그래도 나는 즐겁다.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휴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오후 8시가 다되어서 집으로 도착, 사랑하는 아내와 10개월 된 딸아이가 나를 반긴다. 이것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이번 휴가는 큰맘먹고 유럽으로 날아가 런던 올림픽의 영웅들도 응원하고 싶었건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원대한 유럽원정의 꿈은 날아가고 제주도로 향했다. 그래도 나는 즐겁다. 푸른 바다의 시원함과, 맛있는 음식들, 시원한 공기가 나를 반겨주었고, 일년동안 쌓여있던 피로가 날아만 가는 것 같았다.

  3박 4일 간의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이제부터 슬슬 다시 사무실에 나가야 할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지옥같은 현실이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아직 여유는 있다. 쇼파에 늘어져 올림픽 경기를 보고,,,졸리면 자고,,,,배고프면 먹고,,,,,, 이 얼마만에 누리는 여유란 말인다. 영원히 이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달콤했던 일주일간의 휴가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월요일 요란스럽게 울리는 핸드폰의 기상소리가 왜이렇게 지옥의 종소리 처럼 느껴지는지....결국 사무실에는 지각을 했고...사무실 책상에는 결제 서류가 산더미 처럼 쌓여 있고, 갑작스럽게 다음주 까지 제출하라는 석명준비명령은 왜 이렇게 많이 날라왔는지,,,아무래도 다음주 광복절에는 출근을 해야만 할 것 같구나....

 나의 일주일의 휴가는 그렇게 꿈처럼 사라져 갔다. 다시 1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우울함의 그림자가 나를 하루종일 짓눌렀던 검은 월요일이다.

 

  6월 들어 너무 바뻐 쉴 틈이 없었다. 평일에는 최소한 11시까지 사무실에서 두꺼운 기록과 씨름하다 녹초가 되어 퇴근, 그래도 일이 밀려 주말에도 출근.......하지만 밀린일의 양은 줄어 들지 않는다. 간신히 재판 기일 전날에 서면을 작성하여 마감에 쫓기는 작가처럼 법정에 당일 제출하는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하루살이 인생같은 느낌이랄까....

  왜 이렇게 바빠진 것일까....그래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사건수를 세워보니..이건 뭥미.....75건......지금까지 내가 담당하고 있는 사건수를 정확히 세어보지 않고 그져  40건이나 50건 사이겠지 하고 추측만 했었는데,,,75건이란다......75건...내가 우리법인 탑이다. 사건 담당수로는.....;; 이제야 내가 그토록 바빠진 이유를 알겠다.....보통 한 변호사당 적절한 사건수는 30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좀 많이 배당받는다 싶으면...40건, 50건.....그러나 난 그 한계치를 뛰어 넘은 75건이란다.........그러니까 당연히 바쁠 수 밖에 없겠지....

당장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머리속에 가득찬 사건들의 향연을 끝내고, 에메랄드 빛 몰디브 해변에 내 몸을 맡기고 싶건만, 난 여전히 날 괴롭히는 사건들과 함께 고통스러운 왈츠를 추고 있다.

  오후에 있는 의정부 재판을 마치고 재빨리 사무실에 들어가 밀린 서면을 쓰려고 했건만, 2시 30분 예정인 재판은 앞에 사건진행이 밀려 3시 20분이 넘어서야 끝나고, 부랴부랴 차를끌로 사무실로 향하였건만,오늘따라 길은 왜 이렇게 막히는 것인가?, 짜증이 밀려오고 내 고운 입속에서 나도 모를 아름다울 쌍욕을 뱉어 낸다. 간신히 사무실 근처에 도착하니 벌써 5시가 다 되어 가고, 몸도 마음도 이미 지쳤다. 일할 의욕도 사라졌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핸들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이번주는 주말에 출근 안할거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물론 다음주 밤을 세워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꿈속에 아름다운 몰디브 해변이 날 맞이해주길 굳게 기원한다. 출렁이는 파도소리에 스르르 잠이 드는 나의 낙원 몰디브여....언제 나의 낙원은 길을 열여 줄 것인가, 저 어둠의 괴물같은 사건들로부터 나를 구원해주길...

고시촌 주거공간의 변천사

고시촌이야기 2012. 2. 10. 10: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는 아직도 수많은 고시생들이 각종 시험을 준비하며 거주하고있다. 고시촌하면 의례 생각나는 부분이 고시원일 것이다. 티비 드라마 등에서 고시생은 항상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고시원의 조그마한 방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낡은 추리닝을 입고 책상에 앉아 두꺼운 이른바 육법 전서를 하루 종일 외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제 신림동 고시촌에서 고시원은 점점 사라져가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시생들을 낡고 허름한 고시원에서 거주하지 않고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는 원룸이나 오피스텔에서 거주한다. 

  신림동 고시촌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인 90년대 중반에만 해도 고시촌에 거주하는 고시생들은 대부분은 하숙집이나 고시원에 거주하였다. 고시원의 경우에는 대부분 방은 규모가 아주 작았고, 화장실이나 샤워 시설은 당연히 공용이었다. 그리고 고시원의 경우 고시원 주인이 고시생을 위한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하숙집이라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한달에 약 30여만원을 내면 밥과 숙식이 제공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고시생들은 항상 공부때문에 체력이 딸리기에 고시원 주인 아주머니들은 고기 등 고열랑 음식을 고시생들에게 수시로 공급해주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고시 공부를 할 생각도 없었고, 법으로 밥을 벌어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시촌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 대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할 때 같이 하숙집에 있었던 형이 갑자기 행시 준비를 하겠다며 신림동 고시촌으로 떠났기 때문에 몇번 그 형이 거주하던 고시원을 찾아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 형을 찾아 가면 고시원 주인집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었던 그런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는 그래도 아직은 인정이 남아 있던 시기이다. 그때는 그렇게 신림동 고시촌에 고시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시기이다.

  더불어 고시촌의 고시원 생활이 답답하다며, 지방의 풍경이 좋은 절을 찾아가 공부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절에는 의례 고시생 몇명씩이 꼭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의 절로 소풍을 갔는데, 고시생 몇명이 어린 여선생님을 보자, 여선생님에게 그렇게 말을 걸려고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는 합격생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즉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인 유명한 절들은 항상 고시생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고시원의 영광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새롭게 유입되는 젊은 고시생들은 풍요로운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지 아니하는 고시원을 선호하지 아니하였고 그들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이른바 원룸형태의 집들을 원했다. 쾌적한 환경을 선호하는 젊은 고시생들의 유입으로 고시원은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고시촌에는 원룸이나 오피스텔 등의 속속 들어섰다. 그리고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각종 시험정보 최신판례 등의 업데이트와 단절된 절도 고시생들이 더이상 찾지 않게되었다.

  원룸형태의 주거공간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의 공간에 방, 화장실,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개인공간과 쾌적함을 중요시하는 고시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아주 작고 협소하기 때문에 이른바 '미니원룸'이라고 불리웠다. 삶이 더 여유로운 고시생들은 근처의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을 전세로 얻어 윤택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고시원은 그렇게 고시촌의 중심적인 주거공간의 위치를 넘겨주고, 신림동 고시촌 산꼭대기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직도 고시원은 고시생들의 유용한 공간이다. 특히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오랜기간 고시준비로 경제적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이른바 장수 고시생들에게는 고시원은 아직도 저렴하게 거주하며 공부할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 신림동 고시촌은 이제 서서히 고시생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법시험은 조만간 사라질 전망이고, 행시나 외시도 그 제도의 변경으로 우리가 불렀던 고시생들의 숫자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신림동 고시촌의 원룸이나 고시원에 거주하는 이들도 고시생에서 저렴하게 방을 잡기를 원하는 직장인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고시촌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신림동 고시촌이라는 이름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후 3시에 서산에서 재판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조정기일이었는데 별다른 성과없이 양측 당사자의 감정의 골만 깊어졌기에 다소 무거운 마음을 안고 버스에 탔다. 피곤함이 몰려와 주변의 풍경을 볼 여유도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버스는 약 2시간여를 달려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른한 몸을 이끌고 버스에 내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에서 대학후배 녀석을 우연히 만났다. 말이 후배이지 9살 정도 차이나는 녀석이었다. 대학 선후배 모임에서 만나서 간간히 연락하던 녀석이었는데, 그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오래간만에 본 것이다.

  녀석은 강남의 어학원으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녀석은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이었다. 이제 취업을 걱정해야 할 나이가 되어서 이른바 스펙관리하느냐고 힘들어 죽겠다고 한다. 학점은 기본적으로 따 놓아야 하고, 토익도 900점이상은 획득해야 그나마 괜찮은 직장에 면접이라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그외에도 각종 자격시험 등을 보아 스펙을 갖출 수 있는 만큼 갖추어 놓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녀석의 한숨은 아무리 스펙을 갖추어 놓아도 녀석이 원하는 이른바 좋은 직장은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청년실업 어느덧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젊은이들이 원하는 고용이 보장되고 적장한 임금이 보장되는 이른바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젊은이들은 취업난의 고통속에 실업자로 내몰린다.

 사회는 점점 좋은 스펙을 요구하고, 얼마 안남은 좋은 일자리를 위해 젊은이들을 경쟁의 굴레로 몰아넣는다. 내가 대학을 다닐때만 해도, 나름대로 대학의 낭만이 있었다. 1.2학년 때에는 마음껏 놀아도 괜찮았다. 선동열의 방어율과 비슷한 학점이 나와 학사경고장이 나와도 대학생활에서 한번쯤은 경험해봐도 되는 그런 것이었다.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을때만 해도 졸업을 앞둔 선배들은 취업이 될까라는 걱정보다는 여러개의 회사 중에 어디로 골라 갈까 하는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그만큼 그 시절은 청년들의 일자리가 보장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IMF가 오고, 무한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평생 보장되었던 평생 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수시로 반복되는 구조조정, 40대만 넘어서도 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고용불안, 값싼 노동력을 선호하는 대기업의 행태로 인한 비정규직의 양산 등으로 젊은이들이 원하는 질 좋은 직장의 수는 줄어만 갔다. 

 국민소득 2만달러가 넘어가고, 무역규모가 1조원 달러를 넘어갔다고 정부에서는 연일 자랑질을 하고 있지만, 국민소득이 채 1만달러가 안되었던, 그러나 아버지의 퇴근길에는 자식을 위한 따스한 치킨이 들려있던 그 시절이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국민소득 2만 달러의 혜택은 몇몇 가진 자에 편중되고, 무역규모 1조 달러의 달콤함은 몇몇 대기업만 누릴 수 있고, 그로인한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개천의 용은 사라졌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어쩌면 아버지가 부유층이 아닌 한 신분의 장벽을 영원히 넘어 설 수 없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88만원 세대라는 비아냥 거림을 들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잃어버린 세대'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다음에 또 보자며 성급히 지하철역에서 내리는 녀석의 축 처진 어깨를 바라보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깊은 한숨과 고뇌를 느낄 수 있기에 집으로 오는 내내 측은함이 들었다.


 
 점심식사 전까지만 해도 즐거운 금요일이었다. 다소 부담스러웠던 오전 재판은 새로운 증
거를 추가하여 밤을 새워 쓴 서면 덕분인지 우리측에게 다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오후에 증인신문이 예정되어 있던 재판은 상대방이 기일변경을 신청해와 한 시름 덜게 되었다.

 이제 점심을 먹고 금요일까지 제출할 의견서의 마무리만 하면 즐거운 주말이 나를 반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의견서를 마무리 짓고 달콤한 커피한잔과 김광석의 애절한 음악을 들으며 오래간만에 감상에 젖어 있는데, 직원이 급작스럽게 들오오더니 내일까지 의견서를 낼 것이 있다며 질의서를 들고 왔다.

내일까지? 그렇다면 오늘 일찍 퇴근하기는 ;;, 그러나 쉬운 의견서일지도 몰라 하며 바라본 질의서, 이런 젠장 기업회생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생소한 분야의 질의서였다.
이런제기랄...어떤 놈이야 나의 소중한 금요을 저녁을 빼앗아 간 질의서를 보낸놈이 라는 욱하는 그 무엇인가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왔다.

 하지만 이성을 찾아야 했다. 적어도 토요일에는 회사에 나와서는 안된다. 나의 소중한 토요일까지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질의서를 읽고 또 읽어 사실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나 답을 내리가가 정말 힘들었다. 왜냐면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니까...;;

  기업회생 관련 서적을 이제 탐독해야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이것 저것 관련 서적을 뒤지고 정리하며 계속 되었고, 어느정도 답을 정리할 수 있겠구나 하니, 벌써 저녁 9시가 넘어갔다. 사무실에는 변호사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적어도 의견서를 던져준 직원은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냐 라고 투덜대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타 마셨다. 달콤하게만 느껴졌던 커피가 이제는 왜 이렇게 쓰게 느껴질까....

자료를 정리하고 이제 의견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자료를 대충 정리하고, 초안을 짜 놓았으니 금방 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견서를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고 또 다시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며 해결책을 찾아내고 하며 의견서를 완성하니 시계의 시침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의견서를 메일로 관련 기관에 보내고 긴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향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김광석의 마지막 앨범에 실렸단 '부치지 않은 편지'를 볼륨을 크게 하여 틀어놓고 목이터져라 따라 불렀다. 내 소중한 금요일 저녁을  빼앗아간 얄미운 의견서, 김광석의 노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처량하고 슬프게 들리는 것일까? 야근없는 유토피아 같은 직장은 없는 것일까? 이럴때 개업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은 요즘 어려운 법률시장에 회사에서 안 짤리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숨죽이고 살아야만 할 뿐;; 그래도 나에게는 소중한 토요일, 일요일이 보장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시촌 입성기(고시촌 탈출기 1)

좌충우돌고시촌탈출기 2012. 2. 4.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서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였다. 비록 법학을 전공하기는 하였지만 나는 법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 보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학 1학년때 처음 접한 민법총칙은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 외계어 같은 각종 법률용어, 이론 등은 아 내가 괜히 법학을 전공했구나 하는 충격을 주었고 나는 1학년을 마치고 즉시 군대로 도피를 택했다. 그만큼 법학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강릉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열심히 싸우고, 제대를 하고 보니 대한민국은 듣지못했던 외환위기로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고, 평생 고용이 보장되었던 직장은 이제 실업자를 양산하며 수많은 가장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시골에서 힘겹게 자식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난 안정적인 무엇인가를 해야했고, 그렇게 택한 것이 결국 적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법시험 준비였다.

  그러나 쉽게 고시공부를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난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에 취해 신나게 거래에서 친구들과 "대한민국"을 외친 후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조용히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림2동 산꼭대기에 위치한 조용한 원룸에 정착했다. 그때가 아마도 2002년 가을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혼자 조용히 입성한 고시촌은 나에게 어색했고 쓸쓸했다. 생전 처음 고시식당에서 아무도 모르는 이들과 섞여 혼자 밥을 먹는 것이 가장 어색했고, 독서실에서 하루 종일 법서를 바라보는 것도 민법총칙의 충격에 군대로 도피했던 나에게는 신기하리 만큼 어색했다. 독서실 책상에 조용히 공부해달라며 음료수 하나와 메모지를 받은 것도 어색했다. 그러나 가장 어색한 것은 하루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 고립무원의 무인도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때였다.


쓸쓸함, 독서실에서 힘겨운 공부를 마치고 달빛을 조명삼아 산꼭대기 원룸을 꾸역꾸역 올라 갈때는 쓸쓸함을 넘어서는 표현할 수 없는 처량함이 밀려들어 왔다. 고시촌에서의 몇달의 생활을 통하여 수시로 받는 조용히 해달라는 메모지, 고시식당에서의 어색한 식사 등 등이 익숙해졌지만, 쓸쓸함과 외로움은 여전히 어색한 친구였다.

  더욱 나를 당황시키는 것은 역시 법학이라는 과목에서 오는 어색함이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니 모든 것들이 구멍이었다. 민법은 여전히 외계어처럼 들려오고, 형법총칙의 이론들은 내가 법을 공부하는 것인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했다.

 그러나 신림동 고시촌에 꿈을 품고 입성한 이상, 즉 사나이가 칼을 뽑은 이상 무라도 썰어야했다. 어떻게 해서든 1년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밤공부를 마치고 원룸에 돌아와 창문을 열면 신림동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 이곳을 내가 벗어 날 수 있을지, 아니면 패배자가 되어 쓸쓸히 퇴장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난 과연 신림동 고시촌을 탈출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의 신림동 고시촌 생활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법불신의 시대를 살고있다.

시사비평 2012. 1. 28. 09: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영화 도가니에 이어서 부러진 화살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부러진 화살은 흥행에 성공하며 일반 대중에게 법원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고 어필하고 있다.

 

 우리는 사법불신의 시대를 살고 있다. 법원 앞에는 연일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판결을 한 판사의 이름을 공포스러운 빨간 글씨로 적어 1인 시위를 하고 있고,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의 판결의 결과에는 이념적 성향에  따라 정의롭지 못한 판결이라며 사법부를 비판하고, 심지어는 판사의 집앞에서 날계란을 던지며 항의하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법부를 비판한다.

  영화 부러진 화살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직설적으로 사법부의 판단이 잘못됬으며, 정의롭지 못한 판결로 선량한 시민이 희생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 사법불신의 시대를 초래한 것일까?

  대중들의 법조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판사의 판결은 정의롭지 못하며, 검사는 권력에 아부하는  집단이며, 변호사는 돈만 밝히는 수전노 같은 존재이다. 대중들에게 법조인 및 사법부는 항상 개혁의 대상이며, 때로는 타도의 대상이기도 하다. 

  자업자득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선배 법조인들은 과거 군사 독재시절 그들의 눈치를 보며 정의롭지 못한 판결을 내린 것이 사실이었고, 변호사는 의뢰인이 고액의 수임료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진행 과정 내내 변호사 얼굴 한번 볼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과거 다소 무지했던 대중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그려러니 하고 넘어갔지만 투철한 시민의식으로 무장된 대중들은 이제 과거의 무지했던 그들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각인된 사법불신을 깨트리기는 너무나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법조비리 사건이 종종 터질때마다 사법불신을 종식시킬 개혁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유아무야 넘기며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렸고, 대중의 기대는 실망감을 넘어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한 대중들은 이제 양치기 소년이 되어 버리는 사법개혁을 믿지 않는다.

 그러한 대중의 좌절감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마른 사막의 모래땅을 옥토로 만든다는 각오로 이제라도 정의의 칼을 들어야 할 때이다. 법원은 누가 보아도 신뢰할 수 있는 판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대중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른바 전관예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나와야 할 것이고, 나와 같은 변호사들은 보다 낮은 자세로 의뢰인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대중은 법이 정의롭고 만인에게 공평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법은 항상 가진자에게 유리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가혹하다고 여긴다. 탈주범 지강헌이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외침은 아직도 대중들에게 진실로 다가온다.
 
   법은 공평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진리를 지키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가야만 한다. 진리의 고된 행군을,  그래야만 대중들의 뿌리깊은 사법불신의 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분별한 조상땅 찾기 소송 경계해야

승소판결 2012. 1. 3.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최근에 이른바 조상땅 찾기 소송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 토지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토지조사부에 그 명의가 기재되어 사정받은 경우 원시취득을 인정하는 대법원의 판례에 의해, 토지조사부에 기재된 자의 후손들이 이를 발견하여 조상땅 찾기 소송을 벌이는 일이 빈번한 상황이다.

 이러한 조상땅 찾기 소송의 유행에 편성하여, 이를 전문적으로로 하는 법무법인도 있는 상황이고, 심지어는 조상땅찾기 소송을 부추기는 브로커까지 판치는 형국이다. 그러나 사실관계를 명확히 파악하지 않고 브로커의 농간에 속아 소송을 제기하였다가는 소송비용만 지불하고 아무런 실익도 없이 패소할 수 있어 당사자들은 이를 경계해야 한다. 최근에 내가 맡아 종결된 사건도 이러한 조상땅찾기 사건이다.

1. 사실관계

이 사건 토지는 피고의 소유권보존등기가 되어있었으나, 한국토지공사에 수용되어 피고가 약 9웍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작성된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원고들의 외할아버지가 사정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원고들은 이를 이유로 자신들이 외할아버지를 상속하여 이 사건 토지의 소유권자이므로 토지수용보상금 9억원이 자신들에게 귀속된다면서 부당이득금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2. 보존등기의 추정력과 이 사건의 쟁점

 이 사건 토지는 피고의 명의로 그 보존등기가 되어 있었으나, 대법원의 확고한 판례에 의하면 토지조사부에 소유자로 등재되어 있는 자는 그 토지를 원시적으로 취득하게 되고, 그 소유권 보존등기의 추정력이 깨어진다고 할 것이므로, 이 사건의 변호인은 나로서는 피고가 이 사건 토지를 정당하게  취득하여 이 사건 토지의 보즌등기가 실체관계에 부합하여 피고에게 토지수용보상금이 귀속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다. 이에 피고의 대리인인 나는 피고의 부가 이 사건 토지를  원고의 외조부로부터 1946년경 매수하여여 1965년경 피고에게 이 사건 토지를 증여한 사실, 설령 피고가 이 사건 토지를 증여받은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피고가 1965년경 부터 이 사건 토지를 수용될때까지 소유의 의사로 점유하여 점유취득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3. 피고의 부가 이 사건 토지를 정당하게 원고의 부로부터 매수한 사실을 입증

 피고의 부가 이 사건 토지를 원고로부터 정당하게 매수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우선 이 사건 토지가 소재하고 있는 곳은 지역토박이들이 수십년이상 거주하여 그 지역 사실을 잘알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여, 이 지역에 수십년이상 거주한 사람들로부터 피고의 부가 해뱅이후 이 사건 토지를 원고의 외조부로부터 매수하였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

또한 피고가 이 사건 토지를 1965년경부터 점유하면서, 1958년 제정된 민법 부칙 제10조에서 정한 기간이 경과하기 전에 이 사건 등기를 마친 사실을 찾아내어, 피고가 정당한 소유자임을 주장하였다. 더불어 원고의 외조부가 1982년까지 이 사건 토지의 근방에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고가 수십년이상 이 사건 토지를 점유해온 사실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 사실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입증사실을 바탕으로 재판부는 피고의 부가 이 사건 토지를 해방이후 원고의 외조부로부터 정당하게 매수하여, 피고하게 증여하였으므로 이 사건 토지의 보존등기는 실체적 권리관계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였다.

4. 점유취득시효의 완성

  피고의 대리인은 나는 설령 이 사건 토지를 피고의 부가 매수한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피고가 1965년경부터 이 사건 토지를 소유의 의사로 20년 이상 점유하여 점유취득시효가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원고의 대리인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다. 즉 이 사건 토지는 이미 수용되어 점유사실을 피고가 입증하여야 함에도 원고는 피고의 20년이상 점유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법 제197조 제1항에 의하여 그 점유가 소유의 의사로 평온.공연하게 계속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원고가 피고의 악의의 점유를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점유취득시효에 있어서 점유의 다툼은 중요하다고 할 것인데 원고가 스스로 점유사실을 인정하여 그 입증책임을 스스로 지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에 원고는 일관되게 토지조사부에 원고의 외조부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이 사건 보존등기의 추정력이 깨어지므로 피고의 점유는 악의의 무단점유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원고의 대리인의 점유취득시효의 법리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주장하는 무의미한 주장에 불과하였다.

이에  피고의 대리인은 점유취득시효의 완성을 보다 명확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피고로부터 토지를 임차하여 토지가 수용될때까지 거주하며 임대료를 지급해온 어려명의 임차인의 진술을 확보하였고, 이를 입증할 각 건물등기 등을 제출하여 피고가 20년 이상 이 사건 토지를 간접점유한 사실을 밝혀냈고, 원고의 대리인은 보존등기의 추정력이 깨어져 피고의 부가 이 사건 토지를 원고의 외조부로부터 매수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피고의 부가 이 사건 토지를 원고의 외조부로부터 매수한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피고는 이 사건 토지를 피고의 부로부터 증여받아 점유시효취득하였다는 것으로, 피고의 부가 이 사건 토지를 원고의 외조부로부터 매수하였는지 여부는 이 사건 토지의 내력에 불과하여 점유취득시효가 완성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더불어 원고는 피고가 이 사건 토지를 증여받을 당시 피고의 부가 토지의 처분권한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알면서 점유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였으므로 민법 제197조의 점유의 추정은 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재판부는 피고 대리인의 위와 같은 증거자료와 주장을 받아들여 피고가 이 사건 토지를 20년 이상 소유의 의사로 평온 공연하게 점유하여 점유취득시효 또한 완성된다고 판단하였다.

5. 무분별한 조상 땅 찾기 소송 경계해야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재판부는 피고의 보존등기가 실체적 권리관계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이 사건 토지수용보상금 9억원은 피고에게 귀속된다고 판결을 내렸다. 최근에 조상 땅 찾기 소송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이른바 브로커들이 조상 땅 찾기 소송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위 사례의 경우처럼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조상 땅 찾기 소송을 부분별하게 진행하였다가는 소송비용만 챙긴 브로커만 좋은 일 시키고 정작 자신은 아무런 이익도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겠지만, 단지 토지조사부에 그 이름이 기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토지의 원시취득을 인정하여 보존등기의 추정력을 깨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의사주의를 채택하여 소유권을 취득하고도 등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였고, 농촌의 경우는 더욱 심하였다, 더불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유권변동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분실하는 경우도 빈번하였고,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소유권변동이 없었다고 추단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 모든 것이 결국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겪은 우리의 아픈 과거의 산물일 수 밖에 없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사건의 피고는 이 사건 토지가 자신의 토지로 여기고 그 수용보상금을 모두 소비하였는데,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원고로부터 이 사건 토지가 자신의 토지라며 보상금 9억원을 달라며 소송을 제가하고 집까지 압류하였으니, 사건을 의뢰하며 많이 놀라고 당황스러워 하였다. 다행히 이 사건 토지의 정당한 취득 및 점유취득시효를 입증하여 승소판결을 받아 피고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을 보니 조금의 보람을 느끼는 사건이었다.

토지 소유자가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분별한 조상 땅 찾기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소송비용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왈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상담 전화 : 010 3146 9735,  채희상 변호사, 법률사무소 진실

법원에서 느끼는 불황의 그림자

좌충우돌변호사일기 2011. 12. 20.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는 생각외로 오래간다. 미국을 벗어나 이제 유럽을 휩쓸며 전세계를 불황의 깊은 늪에 빠지게 만들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출을 대상으로 하는 몇몇 대기업은 불황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게 직원들에게 연말에 두둑한 성과급을 지급하며 돈잔치를 벌이고 있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긴 불황의 늪에서 연말의 분위기 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불황의 깊은 그림자는 법원에서도 느낄 수 있다. 재판을 하러 법정에 앉아 담당 사건을 준비하며 법정을 바라보면, 많은 이들이 카드빚을 갚지 못하여, 채권양수기관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하고, 어려운 경제적 형편상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보증기관으로부터 보증을 받아 사업자금을 마련하였으나, 사업의 부진으로 부도를 내고 보증기관으로부터 구상금을 청구당하는 빈번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채권자로서는 채권회수를 위해 당연히 소송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하지만 간간이 법정에서 고령의 노인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들의 부탁으로 연대보증인 등이 되어 법정에 출석하여 그들의 사정을 하소연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가슴이 아려오는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고령의 노인의 꾸부정한 모습으로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을, 아들의 바라본다면 그 심정이 어떠할까?

정부에서는 무역1조달러를 달성하였고,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섰다며 호들갑 떨고 있지만 무역1조달러의 혜택은 몇몇 대기업에 국한되는 듯하다. 법원에는 여전히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신청하는 이들로 북적이고, 불황의 그늘을 견디지 못한 한때는 유망 중소기업이었던 기업이 파산신청을 하기위해 법원에 온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개인회생을 문의하는 전화를 하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다.

경제난으로 회사에서 쫓겨나거나, 명예퇴직을 당한 아직 한창인 이들은, 자의반 타의반 자영업의 세계로 들어오고 결국 자영업의 공급과잉으로 많은 이들이 대출금을 변제하지 못하고 금융기관이나 보증기관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아들의 빚보증을 했던 백발의 어머니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행방불명된 아들 대신 법원에서 그들의 사정을 하소연한다.

얼마전에는 법정에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를 대동하고 사라진 남편의 빚을 탕감하여 달라고 울며 하소연 하는 젊은 여성을 보았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어머니의 하소연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는 무엇을 생각할까.


법원 앞은 많은 이들이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고, 오늘따라 법원은 유난히 춥다. 무역1조달러의 달콤한 과실은, 적어도 법원 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눈앞에 보였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하이킥 고영욱과 쓸쓸한 젊은날의 오버랩

고시촌이야기 2011. 12. 13.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간만에 일찍 퇴근하여 티비를 보았다. 티비에는 '하이킥3'가 하고 있었다. 과거 하이킥 1,2는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있지만, 최근에 방영한 하이킥3는 바쁜 업무탓인지, 재미가 없어서 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오래간만에 본 하이킥3에서는 고시생으로 출연하는 고영욱의 슬픈 이별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고시생 고영욱,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사랑하는 이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영욱은 절에 들어가기전 사랑하는 박하선을 위해 아르바트를 해서 번 돈으로 이것저것 준비하며 최선을 다하지만 박하선은 불편해한다. 그리고 자신이 박하선이 자신이 없는 자리에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결국 박하선을 떠난다.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지만 참는거 하는 잘하는데.....라며 쓸쓸히 떠나는 고영욱을 바랍며 내 젊은날의 기억이 오버랩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아마도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고영욱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적부터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없었던 나....그나마 공부는 좀 하는 편이었지만, 그것도 남들에게 자랑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내세울 것이 없었기에, 세상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기에 나는 고시생의 모습으로 신림동에서 수년간을 방황했다.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눈을 낮추어라, 평생을 고시생으로만 살거냐며 비아냥 거리지만, 젊은이들이 살아가기에 세상은 무정하기만 하다. 대학에 들어가면 행복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대학등록금 걱정에 젊은이들은 캠퍼스의 낭만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고, 대학을 졸업해도 그들을 만족시킬 일자리는 없어, 수년간을 고시촌이나, 독서실을 배회하게 하는 고등룸펜으로 만들어 버린다.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그렇게 잔혹하게 다가 오는 것이다.

 신림동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어느정도 자신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갈 수록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점점 작아지는 내 모습을 쓸쓸히 나는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더욱 깊숙히 신림동 고시촌에 빠져들어야만 했던...슬픈 기억.....

점점 사라지는 희망과 자신감 속에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을 마음속으로 보내고 이별해야 했던 쓰디쓴 젊은날의 기억이 자신감 없는 고시생 고영욱과 오버랩되며 한때 잊고 있었던 신림동 고시촌의 차가운 늦 가을바람아래 쓸쓸히 불합격 통보를 받고 흐느껴 울던 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어찌어찌하여 신림동 고시촌의 차가운 터널을 탈출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삶은 가혹하고 힘겹게 다가온다. 해소될 것 같지 않은 빈부의 격차속에 개천의 용은 실종된지 오래고, 많은 젊은이들의 허울뿐인 비정규직의 굴레에서 88만원인생이라는 비참한 소리를 들으며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신림동 고시촌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몇몇 선배들과 후배들을 바라볼때 나의 쓰라린 가슴은 더욱 아파온다. 오래간만에 본 티비프로그램이 내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 트라우마를 건드려 놓았다. 


  우리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자신감 없고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고영욱 같은 슬픈 아픔을 가진 젊은이들은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고영욱처럼...그렇게 절로, 고시촌으로,,도서관으로....비정규직으로...그렇게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웃자고 본 '하이킥3'가 이렇게 슬프게 다가올 줄이야.. 내일 재판을 위해 늦은 밤까지 기록을 보고 증인신문 사항을 준비해야 할 나는,,,오늘 쓸쓸히 떠나는 고영욱의 모습과 방황하던 내 젊은날의 모습의 오버랩에....오랫동안 잠을 못이룰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