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과 어머니

고시촌이야기 2013. 3. 4. 23:29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함께 사법시험 준비를 했던 K군의 고향은 시골이었다. K군의 아버지는 어릴적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셨고, 홀어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임에도 K군을 잘 키웠다. 어머니에게 K군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머니의 희망대로 K군은 시골에서 수재로 소문이 날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이른바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명문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K군의 고향사람들은 K군이 곧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 또는 검사가 될 것이라고 믿었고 K군의 어머니 또한 K군의 합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K군은 그러한 어머니의 기대속에 조기에 합격하겠다는 기대속에 군대를 제대하자 마자 신림동 고시촌 가장 값이 싼 허름한 고시원에 들어갔다. K군은 빨리 합격해서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고 싶었다. K군은 고시원에 자리를 잡고 온 종일 두꺼운 법서와 씨름하였다. 그리고 2년만에 사법시험 1차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사법시험 합격이 코 앞으로 다가온 듯 했다. 1년만 더 고생해서 2차 시험만 합격하면 어머니를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K군은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사법시험합격 선물로 받은 독립선언서

고시촌이야기 2012. 10. 23.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지난 금요일 제54회 사법시험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아마도 신림동 고시촌은 합격의 기쁨과 낙방의 아픔이 공존하며 하루종일 술렁거렸을 것이다. 사법시험 합격생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하루였을 것이다.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지난 수년간의 고되고 힘든 순간들이 떠올라 벅차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54회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 소식을 들으니,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때가 2008년 10월경이나 벌써 4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2008년 나는 무척이나 자신감이 없었던 시절이다. 2007년 4번째로 본 사법시험 2차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춥고 어두운 겨울의 터널을 지나 1차 시험에 합격을 하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무더위와 싸우며 2차 시험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10월 합격자 발표의 날이 다가왔다. 1차시험에 처음합격했을 때 나는 초시로 단번에 시험에 합격하겠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고시촌에서 도들 닦듯이 오랫동안 공부하는 장수생은 나의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시는 커녕 재시에서도 낙방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자신감에 차있었다. 하지만 세번째 2차시험에도 떨어지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4번째 시험에도 떨어지면서 난 처음으로 고시원 옥상에 올라가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나의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장수생이 나는 되어가고 있었다.그리고 철없이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이 가득했던 나는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2008년 10월 21일 그날은 제50회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고시원을 나가 관악산을 거닐다가 발표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상원서적으로 향했다. 그리고 합격자 명단에서 나의 이름을 보았을 때 그 때의 감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08년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 당시 고시촌)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부모님께 전하고 나는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에는 부끄럽게도 나의 뒤늦은 합격을 축하한다는 플랭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떼어내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기뻐하시는 마음을 생각하여 그대로 두었다. 지금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고향에 도착하니 친척, 동네주민분들께서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의 고향은 아직도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는 시골마을이라, 아직도 사법시험이 마치 과거시험에 급제라도 한 것처럼 대단한 시험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동네주민과 부모님의 축하를 받으며 오래만에 마음편히 고향집에 머무르던 어느날, 백발이 성성한 동네 어르신 한분이 찾아와 정성스럽게 포장한 무엇인가를 전해주셨다. 솔직히 그 분은 부모님과는 친분이 있는 분이셨지만, 나는 일면식도 없는 낯선 분이었다.

 그분께서 별다른 말씀없이 전해 주신 것은 한자,한자 정성스럽게 직접 쓰신 독립선언서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니 독립선언서을 마음깊이 새기며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라는 뜻으로 정성스럽게 작성한 그 독립선언서을 나에게 시험합격 선물로 준다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웠다. 얼핏 보아도 작은 글자로 빽빽하게 기재된 독립선언서는 작성하는데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갔을 것이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그분께서는 왜 보잘것 없는 나에게 그렇게 정성이 가득 담긴 독립선언서를 준 것일까?

 아직도 나는 그때 받은 독립선언서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을 뿐, 사무실이나 집의 벽에 걸어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독립선언서이 나에게 너무나 과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나라를 위한 큰일은 커녕, 조그마한 법무법인에서 사건이 복잡하다, 의뢰인이 너무까다롭다고 투덜거리며 변호사의 능력을 수시로 시험당하는 그져 그런 변호사의 길을 살고 있다. 나는 그분이 의도한 대로 그러한 큰 뜻을 펼칠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이기에 그분의 정성이 가득담긴 독립선언서를 받을 자격이 없기에 독립선언서를 떳떳히 내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오면, 난 그때 받아 책장 한구석에 고이 보관해온 독립선언서를 펼쳐본다. 내가 사법시험에 그토록 메달렸던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변호사의 길은 옳은 것인지를  그 짧은 순간이라도 고민해본다.

 이제 사법시험 합격은 큰 영광이 아니다. 그러나 사법시험 합격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제5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선배.후배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보낸다. 고된 노력의 결과가 이제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축하받을만 하다. 그러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많은 이들이 나같이 평범한 변호사의 삶을 살지 말고, 보다 의미있고 어려운 이들의 삶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러한 법조인의 삶을 살기를 기원해본다.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평범한 변호사이기에 그런 기원을 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고시촌 주거공간의 변천사

고시촌이야기 2012. 2. 10. 10: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는 아직도 수많은 고시생들이 각종 시험을 준비하며 거주하고있다. 고시촌하면 의례 생각나는 부분이 고시원일 것이다. 티비 드라마 등에서 고시생은 항상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고시원의 조그마한 방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낡은 추리닝을 입고 책상에 앉아 두꺼운 이른바 육법 전서를 하루 종일 외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제 신림동 고시촌에서 고시원은 점점 사라져가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시생들을 낡고 허름한 고시원에서 거주하지 않고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는 원룸이나 오피스텔에서 거주한다. 

  신림동 고시촌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인 90년대 중반에만 해도 고시촌에 거주하는 고시생들은 대부분은 하숙집이나 고시원에 거주하였다. 고시원의 경우에는 대부분 방은 규모가 아주 작았고, 화장실이나 샤워 시설은 당연히 공용이었다. 그리고 고시원의 경우 고시원 주인이 고시생을 위한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하숙집이라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한달에 약 30여만원을 내면 밥과 숙식이 제공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고시생들은 항상 공부때문에 체력이 딸리기에 고시원 주인 아주머니들은 고기 등 고열랑 음식을 고시생들에게 수시로 공급해주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고시 공부를 할 생각도 없었고, 법으로 밥을 벌어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시촌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 대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할 때 같이 하숙집에 있었던 형이 갑자기 행시 준비를 하겠다며 신림동 고시촌으로 떠났기 때문에 몇번 그 형이 거주하던 고시원을 찾아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 형을 찾아 가면 고시원 주인집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었던 그런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는 그래도 아직은 인정이 남아 있던 시기이다. 그때는 그렇게 신림동 고시촌에 고시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시기이다.

  더불어 고시촌의 고시원 생활이 답답하다며, 지방의 풍경이 좋은 절을 찾아가 공부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절에는 의례 고시생 몇명씩이 꼭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의 절로 소풍을 갔는데, 고시생 몇명이 어린 여선생님을 보자, 여선생님에게 그렇게 말을 걸려고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는 합격생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즉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인 유명한 절들은 항상 고시생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고시원의 영광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새롭게 유입되는 젊은 고시생들은 풍요로운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지 아니하는 고시원을 선호하지 아니하였고 그들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이른바 원룸형태의 집들을 원했다. 쾌적한 환경을 선호하는 젊은 고시생들의 유입으로 고시원은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고시촌에는 원룸이나 오피스텔 등의 속속 들어섰다. 그리고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각종 시험정보 최신판례 등의 업데이트와 단절된 절도 고시생들이 더이상 찾지 않게되었다.

  원룸형태의 주거공간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의 공간에 방, 화장실,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개인공간과 쾌적함을 중요시하는 고시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아주 작고 협소하기 때문에 이른바 '미니원룸'이라고 불리웠다. 삶이 더 여유로운 고시생들은 근처의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을 전세로 얻어 윤택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고시원은 그렇게 고시촌의 중심적인 주거공간의 위치를 넘겨주고, 신림동 고시촌 산꼭대기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직도 고시원은 고시생들의 유용한 공간이다. 특히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오랜기간 고시준비로 경제적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이른바 장수 고시생들에게는 고시원은 아직도 저렴하게 거주하며 공부할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 신림동 고시촌은 이제 서서히 고시생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법시험은 조만간 사라질 전망이고, 행시나 외시도 그 제도의 변경으로 우리가 불렀던 고시생들의 숫자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신림동 고시촌의 원룸이나 고시원에 거주하는 이들도 고시생에서 저렴하게 방을 잡기를 원하는 직장인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고시촌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신림동 고시촌이라는 이름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이킥 고영욱과 쓸쓸한 젊은날의 오버랩

고시촌이야기 2011. 12. 13.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간만에 일찍 퇴근하여 티비를 보았다. 티비에는 '하이킥3'가 하고 있었다. 과거 하이킥 1,2는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있지만, 최근에 방영한 하이킥3는 바쁜 업무탓인지, 재미가 없어서 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오래간만에 본 하이킥3에서는 고시생으로 출연하는 고영욱의 슬픈 이별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고시생 고영욱,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사랑하는 이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영욱은 절에 들어가기전 사랑하는 박하선을 위해 아르바트를 해서 번 돈으로 이것저것 준비하며 최선을 다하지만 박하선은 불편해한다. 그리고 자신이 박하선이 자신이 없는 자리에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결국 박하선을 떠난다.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지만 참는거 하는 잘하는데.....라며 쓸쓸히 떠나는 고영욱을 바랍며 내 젊은날의 기억이 오버랩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아마도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고영욱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적부터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없었던 나....그나마 공부는 좀 하는 편이었지만, 그것도 남들에게 자랑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내세울 것이 없었기에, 세상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기에 나는 고시생의 모습으로 신림동에서 수년간을 방황했다.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눈을 낮추어라, 평생을 고시생으로만 살거냐며 비아냥 거리지만, 젊은이들이 살아가기에 세상은 무정하기만 하다. 대학에 들어가면 행복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대학등록금 걱정에 젊은이들은 캠퍼스의 낭만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고, 대학을 졸업해도 그들을 만족시킬 일자리는 없어, 수년간을 고시촌이나, 독서실을 배회하게 하는 고등룸펜으로 만들어 버린다.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그렇게 잔혹하게 다가 오는 것이다.

 신림동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어느정도 자신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갈 수록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점점 작아지는 내 모습을 쓸쓸히 나는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더욱 깊숙히 신림동 고시촌에 빠져들어야만 했던...슬픈 기억.....

점점 사라지는 희망과 자신감 속에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을 마음속으로 보내고 이별해야 했던 쓰디쓴 젊은날의 기억이 자신감 없는 고시생 고영욱과 오버랩되며 한때 잊고 있었던 신림동 고시촌의 차가운 늦 가을바람아래 쓸쓸히 불합격 통보를 받고 흐느껴 울던 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어찌어찌하여 신림동 고시촌의 차가운 터널을 탈출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삶은 가혹하고 힘겹게 다가온다. 해소될 것 같지 않은 빈부의 격차속에 개천의 용은 실종된지 오래고, 많은 젊은이들의 허울뿐인 비정규직의 굴레에서 88만원인생이라는 비참한 소리를 들으며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신림동 고시촌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몇몇 선배들과 후배들을 바라볼때 나의 쓰라린 가슴은 더욱 아파온다. 오래간만에 본 티비프로그램이 내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 트라우마를 건드려 놓았다. 


  우리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자신감 없고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고영욱 같은 슬픈 아픔을 가진 젊은이들은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고영욱처럼...그렇게 절로, 고시촌으로,,도서관으로....비정규직으로...그렇게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웃자고 본 '하이킥3'가 이렇게 슬프게 다가올 줄이야.. 내일 재판을 위해 늦은 밤까지 기록을 보고 증인신문 사항을 준비해야 할 나는,,,오늘 쓸쓸히 떠나는 고영욱의 모습과 방황하던 내 젊은날의 모습의 오버랩에....오랫동안 잠을 못이룰 듯 하다. ..

고시생 떠나는 고시촌

고시촌이야기 2011. 12. 6.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 수많은 고시생들이 모여 청운의 꿈을 준비하며 치열하게 공부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신림동 고시촌이라는 이름은 추억의 옛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고시촌을 떠난후 오래간만에 신림동에 찾아갔다. 아니 신림동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이제 대학동 등으로 불리운다.

친구녀석이 아직도 고시촌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에, 신림동 근처에 갈일이 있어서 겸사 겸사 친구녀석도 볼겸해 고시촌을 찾았다. 여전히 고시촌에는 각종 고시학원이 있고, 두꺼운 법서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몇년 전 내가 있었을 때의 분위기와 무엇인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고시학원과 서점은 존재하지만 당시의 치열했던 그 무엇인가가 빠진느낌이랄까...

신림동 고시촌은 이제 변하고 있다. 로스쿨의 도입으로 인해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이들은 이미 많이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고시촌을 빠져나간 상태이고, 행시나 외시를 준비하던 이들도 고시제도의 변경으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고시생들로 꽉차 있던 원룸이나 고시원은 이제 공실이 많거나 싼 값의 거주지를 원하는 직장인들로 채워지고 있다. 고시생들이 줄어들자 각종 고시서적을 파는 서점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고, 고시생들의 식사를 싼값에 해결해주던 고시식당들은 고시생의 감소로 인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야반도주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녀석은 여전히 변함없이 두꺼운 법서와 싸움을 하고 있지만, 내 주의의 많은 선.후배들은 사라지는 고시제도로 인해 일부는 로스쿨에 들어가고, 일부는 직장을 잡아 취업하고, 일부는 고향에 내려가 장사를 하며, 그렇게 고시촌에서 사라져갔다.



오랫동안 공부하는 친구녀석이 안쓰러워 이제 너도 로스쿨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을 했지만, 녀석은 그 많은 등록금을 부담함 엄두가 나지 않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한다. 하기야 시골에서 조그마한 땅을 경작하며 사시는 부모님이나, 소방공무원을 하는 녀석의 동생이 엄청난 등록금을 부담하는 녀석의 로스쿨 학비를 마련해주기는 무리일 것이다. 지금도 근근히 과외, 독서실 총무 등을 하며 공부비용을 마련하고 있는 녀석에게 로스쿨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내가 수년동안 치열하게 공부했던 신림동 고시촌은 이제 서서히 고시생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술집, 직장인들이 들어찬 그런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수많은 청춘의 꿈, 아픔, 합격의 영광을 함께 했던 고시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추억의 낡은 앨범이 되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독서실에서 오전 공부를 마치고 친구녀석과 점심을 함께 했던 고시식당은  사라져 호프집이 되어버렸고, 한순간 밀려오는 고시생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피로를 달래주던 놀이터의 낡은 자판기의 인스턴트 커피는 새롭게 이주해온 이들의 고달픔 삶을 달래준다.

 

 나에게 수많은 아픔과 좌절을 안겨 주었던 고시촌은 항상 나의 기억속에 흑백사진의 잿빛 슬픔으로 기억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찾아온 고시촌은 나에게 과거 치열하게 살았던 나를 다시 볼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무엇일까 쇠락해가는 간이역의 아쉬움을 동시에 주었다.


고시촌의 무늬만 고시생들

고시촌이야기 2011. 1. 11. 07:18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는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많은 고시생들이 밤을 지새우며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한다.대다수의 고시생들은 독서실이나 고시원등에서 다른분야에 관심을 끊고 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나 신림동 고시촌에는 대다수의 고시생들과 다르게 그들의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하는 이른바 무늬만 고시생인 이들도 다수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각종 국가고시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에게 소중한 용돈을 받아서 유흥 등에 탕진하는 고시생들이 많이 있다.

 과거 내가 공부하기 위해 자리잡은 신림동 원룸에 몇달이 지난 후 옆방에 한 고시생이 들어왔다. 그 고시생은 처음 한달 정도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듯 하더니 그 후로 본색을 들어냈다. 매일 밤 친구들을 불러와 술파티를 벌였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늦은 밤 원룸에 들어오면 옆 고시생방은 술파티로 항상 시끄러웠다. 새벽까지 계속되는 시끌벅적한 소리로 잠을 자는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파티를 벌이니 낮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여자친구가 있는지 여자친구를 원룸에 데리고 와 또 수다를 떨었다. 그런 무늬만 고시생에게 한달에 한번씩 어머니가 찾아와 그 고시생 방을 청소하고 빨래거리를 가지고 가 빨아주었다. 생각같아서는 그 무늬만 고시생인 친구의 어머니에게 그 고시생의 평소 행태를 하나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무늬만 고시생의 부모님은 그 친구가 다른 고시생과 마찬가지로 매일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소중한 자식이 안쓰럽다고 생각을 했을 것인데, 그 무늬만 고시생은 공부는 뒷전이고 소중한 젊은 시절을 유흥에 낭비하고 있었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이러한 무늬만 고시생들이 많다. 많은 고시생들이 처음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고시촌에 들어오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막대한 공부분량앞에 질려버려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공부는 부업이고 유흥이 본업이 되어 버린 이들이 많다. 

 또 고시촌에 각종 술집, 바, 등의 유흥시설이 많다보니 혈기왕성한 젊은 고시생들이 부모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쉽게 그러한 유흥시설에 유혹되어 초심을 잃고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소중한 공부비용을 유흥비로 몇년이나 낭비하고 결국 고시촌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오랫동안 국가고시에 도전하였지만, 번번히 실패의 쓴잔을 맛본 이른바 장수생들은 더이상 갈곳이 없어 신림동 고시촌에 눌러 앉아 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미 나이는 들대로 들어 일반 기업에 취업할 수없어 신림동을 벗아나고 싶어도 벗아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도 많은 장수생들은 그들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지만, 또 다른 장수생들은 이미 공부의 뜻을 버렸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신림동에 고시생이라는 타이틀만 걸어두고 머무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본가에서 생활비가 올라오기 힘들어 가능한 신림동 산꼭대기에 있는 허름한 고시원에 머무르며 고시원이나 독서실 총무, 학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생계비를 마련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아르바이트 등으로 공부시간이 부족하여 공부는 하루에 채 몇시간을 하지 못하니 합격의 길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고시생이라는 명칭은 그들에게 하나의 직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이름만 고시생인 이들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무늬만 고시생들은 오늘도 그들의 소중한 젊은 시절을 아무런 의미없이 낭비하며 보낸다. 그러한 이들은 몇년을 낭비한 후에야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는다.

지금 국가고시를 위해 신림동 고시촌 입성을 꿈꾸는 자가 있다면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할 것을 권하고 싶다.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와 합격의 영광을 차지하여 웃으며 떠나는 이들은 10명 중 한명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이들은 실패의 쓴 경험을 안고 떠난다. 그만큼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오기로 결정을 했다면 그 누구보다 성실히, 열정적으로 그들의 꿈을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안경이 부러진 채 사법시험 본 사연

고시촌이야기 2011. 1. 5. 07:49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고시촌에 입성하여 그 해 겨울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비록 경제적 환경이 넉넉하지 못하여 학원은 수강할 수 없었지만 강의테입으로 대체하여 유명강사의 강의도 들었고, 미니원룸과 독서실을 왔다갔다하며 단조로운 생활을 이겨내고 가능한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인지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와도 이전처럼 긴장감과 두려움은 덜했다. 오히려 때로는 시험을 빨리 봐서 내 실력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물론 아주 잠깐이지만,,,,)

 그리고 어느덧 매서운 겨울 바람이 잠잠해지고 봄의 기운이 찾아 올 무렵 사법시험1차시험 전날이 되었다. 그해 시험은 2003년이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법률저널 게시판에 가보니 나와 똑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 글을 올린 것이 있어 다소 참 우습기도 했는데 법률저널 게시판에 보니 안경이 부러져 안경없이 시험을 보았다고 하소연 한 글이 있었다.

그런데 나도 그 해 시험에서 똑같은 경험을 한 것이다.난 중학교때부터 안경을 썼기 때문에 눈이 상당히 나쁘다. 흔해 말해서 안경을 벗으면 거의 장님 수준이다. 그러한 내가 그 해 사법시험 1차시험을 안경없이 본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시험전날 나는 독서실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밤 10시경에 숙소인 미니원룸으로 왔다. 역시 시험전날이라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숙소에 들어와 대충 씻고 내일 시험장에 가지고 갈 책 등 준비물을 정리하고 나니 11시가 다 되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영 오지 않았다. 시험장에 갈려면 그래도 7시경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영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시험장에서 실수하면 어떡하지,또 떨어지면 하는 잡생각만 머리속에서 맴돌고, 또 눈을 뜨면 얼릉 자야지 하며 다시 눈을 감고를 반복하며 시간은 12시, 1시,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영 잠이 오지 않아. 군대시절 이후 끊었던 담배를 물고 창문을 열고 한눈에 내려보이는 신림동 전경을 바라보았다. 고요함이 오히려 더 나의 잠을 방해했다. 그렇게 뒤척이다 난 안경을 침대아래에 두고 새벽3시경에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6시경에 눈을 가까스로 떴다. 잠을 못자서인지 머리가 빙빙돌고 컨디션이 별로 안좋았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침대 아래 방바닥을 밟았는데 무엇인가 단단한 것이 밟히고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경이 두동강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절단나버렸다. 순간 정신이 번쩍들고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주 허탈한 웃음....순간 든 생각은 올해 시험은 또 이렇게 어이없이 망치는 구나 하는 것과 모르겠다.시험보러 가지말까...등등의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갔다.

잠시 놓았던 정신줄을 다시 잡고 방을 뛰쳐나가 안경점을 찾아 갔지만 이른 아침이 문연 안경점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편의점을 찾아가 순간 접착제를 구해 와서 절단난 안경을 접착시키려고 했지만 절단면이 너무 매끄러워선지 안경은 야속하게 계속 떨어져 나갔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이제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시험을 포기할까 하는 고민도 했지만 일단 시험장에 가보기로 했다.

모든 것이 뿌옇게 초점이 잡히지 않은 채 보였다. 버스번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택시를 잡아 타고 가야 했는데, 그때서야 시험당일 날 신림동에 보이는 택시들은 대부분 예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붙잡는 택시마다 예약되어 있다고 승차를 거부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는데 당황스러웠다. 간신히 버스정류장에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버스를 타고 신림역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을 주의깊게 들어야 했다. 그때서야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지금 내모습이 너무나 황당하여 계속 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간신히 시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험은 시작되었다. 시험지도 잘 안보였다.가능한 시험지와 눈을 밀착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글자한자한자를 세심하게 보며 시험을 치루었다. 그때의 모습이 시험감독관도 이상했는지 세심히 나를 관찰했다.

한자 한자 집중해서 보아야 했기 때문에 피로감이 더했다. 오전 시험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담배 하나를 사 군대제대 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폈다. 역시 식후에 먹는 담배맛이 제일이었다.솔직히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점심시간에 다시 급하게 안경을 맞출 시간은 있었지만 그냥 만사가 귀찮았다. 이미 의욕상실이라고 할까....

 그리고 다시 오후 시험을 보았다. 자포자기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험에 대한 긴장감도 이미 사라졌다. 긴장감이 사라지니 어려운 문제 아리송한 문제도 그냥 맘편하게 고민없이 답이라고 생각되는 지문에 정답을 체크했다. 역시 시험은 긴장없이 보아야 해 하면서 말이다.시험을 잘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다시 한번 올림픽정신으로 끝까지 해보자 뭐 그런 생각이었다. 시험지와 다시 내 눈을 밀착시키고 한자한자 글자를 세어가며 시험을 보았다.

악몽같은 하루가 그렇게 끝났다. 시험장을 나오며 다시 담배를 물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도 잘 안보였다. 내 불투명한 미래처럼 모든 것이 흐리멍텅했다. 가까스로 신림동에 와 안경점에 갔다. 그리고 한풀이라도 하듯 내 능력을 뛰어 넘는 비싼 안경을 샀던 기억이 있다.

 작은 내 안식처 미니원룸에 와 그냥 잠이 들었다. 채점이고 뭐고 할 기력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도 너무 웃겨서 웃음만 나왔다. 지금생각해도 웃긴 상황이 아니던가. 며칠후 가답안을 보고 채점을 해보긴 했다. 그러나 점수가 생각보다 잘나왔다. 정확히는 기어나지 않지만 81.5점인가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당시 컷트라인이 내 기억에는 82점이었을 것이다.그런데 81.5점이었다. 아마  그 당시 합격자 발표전까지 컷트라인 공방이 꽤 있었던 기억이 있다.당시에는 좀 아쉬웠다. 만약 안경을 끼고 정상적인 컨디션에서 시험을 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 나의 점수대가 가장 불안한 점수대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불합격이었을까?

아니. 나는 합격했다. 컷트라인이 82점인대 어떻게 합격했냐고? 안경을 안쓰고 어려운 상황에서 시험을 끝까지 마친 것에 대해 법무부가 이를 참작하여 합격을 시켜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당시 경제법을 선택과목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경제법 한문제가 복수정답이 인정되어 0.5점이 올라가버렸다. 그래서 정확히 컷트라인 82점으로 붙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꼴찌로 1차시험에 합격했다.(물론 다음해 2차시험에는 어이없이 떨어졌지만...,,) 컷트라인으로 붙는 짜릿함은 아무도 모른다. 마치 수석으로 붙은 느낌이라고 할까....^^ 안경이 부러진 어이없는 상황에서 시험으로 포기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시험을 보고 드라마같이 꼴찌로 합격을 해버렸다.지금생각해도 내 인생의 역사 중에게 가장 재밌는 상황중에 하나이다.

다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 무엇인가 결과물이 생기는 모양이다. 우리 다시 힘들고 지금은 괴롭더라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말고 도전합시다. 오늘은 어둡고 힘들더라도 내일은 태양이 다시 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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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촌 입성기

고시촌이야기 2010. 12. 29. 08:21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은 어느덧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긋지긋했던 고시촌을 탈출한지도 이제 2년을 넘어서고 있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아직도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각종 시험준비생들이 치열한 시험준비를 하며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고시생들이 모두 꿈을 이루어 고시촌을 탈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고시촌을 떠나는 이들이 더욱 많다. 그리고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떠나는 이들의 빈 공간을 새로운 이들이 채운다.

 신림동 고시촌에 내가 처음 입성한 때는 2002년 겨울이었다. 2002년은 월드컵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웠다. 나 또한 대학에서 월드컵 기간동안 흥분하며 광란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자 현실로 돌아왔다. 

 법대를 나온 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것인가? 취업을 할것인가? 솔직히 대학을 다니면서 사법시험을 몇번 도전했지만 결과는 1차시험에도 떨어졌다. 솔직히 열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떠밀리듯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무엇인가? 내가 갈길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무작정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다. 우선 방을 알아 보아야 했는데 신림9동은 너무나 사람들이 많아 평소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용한 신림2동의 산꼭대기에 있는 조용한 미니원룸에 자리를 잡았다. 

 신림동 고시촌(지금은 대학동으로 변경되었다고 함)은 보통 신림2동과 9동으로 나누어진다. 예전에는 9동에 유명학원들이 몰려 있어 대부분의 고시생들이 신림9동에 몰려 살고 또 편의시설, 복사집등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신림2동에 유명학원들이 옮겨 오면서 독서실, 편의시설도 신림2동에 많이 생겼다.

  내가 선택한 미니원룸은 우선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경치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나즈막한 산이 자리잡고 있어 기분이 울적하거나 하면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름에는 정말 힘들다. 스키장 활강 코스같은  경사로 인해 여름에 학원이나 독서실이라도 나갔다가 복귀할 때에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리고 겨울에 눈이라도 쏟아지면 내려갈 생각을 안하는 것이 속편하다. 굳이 내려갈려면 아이젠이라도 신고 가야 할 정도이다. 그렇게 난 2002년 매서운 바람이 부는 12월 겨울 어느날 신림동 고시촌에 자리를 잡았다.


 딱 3년을 기약했다. 3년이면 충분히 고시촌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능력을 무시한 오만으로 판명되었다. 3년이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신림동 고시촌 생활이 5년이상이 되어 버릴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고시촌의 첫날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잊지 못하는 것 처럼 그날의 기억은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골집을 떠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잠못들며 밤새 뒤척거리던 자취방의 첫경험, 군대입대해서 잠못들며 한숨만 푹푹내쉬던 훈련소에서 첫밤, 마치 고시촌의 첫날은 그런 것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왜 그렇게 매섭게 몰아치던지, 창가를 무서운 소리를 내며 때렸다. 밤하늘은 달빛, 별빛 하나 없어 블랙홀 같은 어둠이 꽉 차있었다. 두꺼운 법서를 책장에 정리고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릴적 추억들, 대학에 입학했던 기억, 부모님, 장래에 대한 고민, 낯선 곳에 있는 어색함 등등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고시촌의 첫날밤은 뒤척거림과 매서운 겨울바람, 한숨으로 무언지 모를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린 소녀의 뺨과 같이 흘러 가고 있었다.

월드컵은 남자 고시생들의 무덤

고시촌이야기 2010. 12. 17. 07:46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지난 10월 27일 사법시험 2차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많은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다. 특히 로스쿨 도입으로 인해 사법시험 합격자 인원이 점차적으로 줄어들어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점점 응시 기회가 줄어드는 만큼 초조함이 더해갔을 것이다.

 이번 시험 합격자의 특성은 여성 합격자의 비율이 처음으로 40%를 넘겼다는 것이다. 행정고시에 이어 여풍이 지속되었다. 이번 행정고시에 있어서도 여성합격자가 총 143명으로 44.7%를 차지하며 여성합격자가 강세를 보였는데 사법시험에 있어서도 전체 합격자 800명 중 여성합격자가 337명으로 42.1%를 차지하였다. 


 여성합격자가 40%를 넘은 것은 이번시험이 처음이었다. 여성합격자가 이렇게 각종 고시에서 강세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분석이 다수를 차지하나 일각에서는 2010년에는 월드컵 등 스포츠 행사가 많아 남자고시생들이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전국민이 월드컵 열기에 빠졌던 2002년에 여성합격자 비율은 처음으로 20%를 넘어 23.9%를 차지하였으나 다음해에는 21%로 다소 하락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월드컵에서는 여성합격자가 37.5%를 차지하며 증가하다가 월드컵 다음해인 2007년에는 하락하였다.그리고 2010년 월드컵에 다시 상승하여 처음으로 40%를 돌파한 것이다.

이를 두고 신림동 고시촌에서는 월드컵 저주가 다시 실현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월드컵 저주란 월드컵, 올림픽 등 각종 스포츠행사가 있는 해에는 유독 남자고시생의 합격률이 저조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남자고시생들의 특성상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고시생들이 여전히 박지성등이 활약하고 있는 잉글랜드의 프리미엄리그가 있는 날에는 만화방이나. 비디오방 등에 삼삼오오 모여 밤을 세워 티비를 보는 경우가 흔하다.

 단순한 클럽경기에도 이렇게 열광하는데 최고의 스타들이 모인 월드컵경기에는 얼마나 열광하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할 것이다.

 실제로 스포츠광인 후배인 B군은 2006년도에 사법시험 2차시험을 치루었다. 1차 시험에만 3번이나 떨어지고 2005년도에 처음으로 1차시험에 붙고 후배는 최선을 다해 2차시험을 준비했다. 주말에도 잠을 제대로 못자며 그야말로 눈만 뜨면 공부에 집중했다.

 그리고 결전의 2006년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후배는 연대에 시험장이 걸려 일찍 시험장 근처로 숙소를 옮겨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시험을 2주정도 남겨놓고 연대근처의 하숙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전국민의 축제 2006년 월드컵이 시작된 것이다. 후배녀석은 평소에도 야구와 축구에 열광하는 녀석이다. 특히 축구는 스페인의 프리메가리그 부터 잉글랜드 리그까지 유럽의 빅리그 소속 유명선수들의 프로필을 모두 외울정도로 광적인 팬이다.

 2006년 6월 13일 경에 약 사법시험 2차시험을 일주일 정도 남겨놓고 대한민국과 토고와의 첫게임이 펼쳐졌다. 후배녀석은 첫경기이고 아직 시험이 일주일남았고, 2시간정도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컨디션 조절에도 좋다는 생각으로 하숙집의 하숙생들과 같이 거실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대한민국을 목이 쉬어라 외치며 열렬히 응원했다.후배녀석의 응원에 힘입은 것인지 대한민국은 토고를 이기며 원정에서 첫승리를 따냈다.

시험을 일주일이나 남겨두었으니 뭐 이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사단은 6월19일 정도(?)에 치루어진 대한민국과 프랑스전에 이루어졌다. 당시 2차시험이 6월 20에 시작되기 때문에 스포츠광인 후배녀석도 더이상은 안돼겠다는 생각으로 연대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마지막 정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처량하게 지는 달빛을 바라보며 하숙집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 왔다는 것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아니고 새벽에 열리는 프랑스전때문이었다.

내가 보지 않아도 대한민국이 잘해낼 수 있을까? 최소한 비겨야 하는데, 박지성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잠깐 잠이 든 후배녀석은 와 하는 함성소리에 잠이 깨어버렸다. 하숙집 거실에서 프랑스전 응원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후배는 잠에서 깨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거실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열렬히 학숙생들과 어울려 응원했다. 녀석의 혼을 다한 응원때문인지 대한민국은 최강 프랑스와 비기는 기적을 연출했다. 녀석은 너무 흥에 겨워 잠에 들지 못하고 하숙생들과 수다를 떨다 오전 10시경에 잠이 들고 그리고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찌는 오후 늦게야 일어났다.

 다음날이 바로 2차시험 시작인데, 후배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언제 두꺼운 교과서 2권을 봐야 할지 앞이 막막하고 이미 전의를 상실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2차시험 4일 내내 허탈함에 사로잡혀 시험을 치지 못했고 결국 그해 2차시험에 헌법 과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다행히 후배녀석은 다행히 다음해 3시로 2차시험에 붙어 지금은 대형로펌의 유능한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아무튼 가끔 만나는 후배녀석은 지금도 그때의 이야기를 무슨 무용담처럼 이야기 한다. 우스운 것은 그렇게 시험을 망치고도 2차시험이 끝나는 날 열렸던 마지막 경기 스위스전을 신림동 고시촌의 만화방에서 치킨과 맥주를 사들고 보며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남자고시생들중에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월드컵은 사법시험 2차시험이 치루어지는 6월달에 개최되어 시험일정과 겹치는 경우가 많아 특히 스포츠에 열광하는 남자고시생들을 힘들게 한다.

 아마도 이러한 여러가지 것들이 겹쳐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는 남자고시생의 합격률이 저조하다는 월드컵의 저주라는 말이 생긴 듯 하다. 하지만 어찌보면 다 핑계일 수도 있다. 월드컵이 열리던 그렇지 않던 여성 합격자 비율은 지속적으로 늘어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고시생 유혹하는 고시촌의 환경

고시촌이야기 2010. 12. 14. 12:04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의 연말은 바쁘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등 각종 시험의 1차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시생들은 독서실이나 고시원에서 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나 일부 고시생들은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고 고시촌이 유혹하는 유혹의 몸짓에 넘어가 안타까운 젊음을 낭비하기도 한다.

1. 불법 성인 업소들
 
 한때 고시촌에는 xxx 스포츠 마사지라는 이름을 건 업소들이 우우죽순 들어섰다. 대부분 짐작을 하겠지만 이러한 업체들은 건전한 스포츠 마사지 업체가 아닌 젊은 남성을 유혹하는 성인 업소들이다. 고시촌의 특성상 젊은 미혼의 남성들이 많이 거주하는 관계로 많은 고시생들이 이런 불법 업소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대대적인 단속으로 인해 이러한 업체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들었지만, 여전히 몇몇업체들은 남아 있어 고시생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위해 고시촌에 온 이상 이러한 유혹에는 참겨 이겨 낼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2.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게임이 있는 PC방
   
   아무래도 고시촌에서 대부분의 고시생들이 독서실과 고시원등을 오가며 작은 공간에 갇쳐 공부를 하다보니 고시생들은 스트레스가 많다. 그래서 많은 고시생들이 피씨방등을 찾아 간단한 게임이나 웹서핑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나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이용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오히려 공부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자칫하다보면 게임에 중독이 되어 버려 소중한 시절을 낭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리니지, 워크래프트등 중독성이 강한 온라인 게임에 중독되어 독서실 대신에 하루종일 피씨방에 출근하여 게임 삼매경에 빠진 고시생들이 피씨방에 가면 많이 목격된다. 

 대학 후배 녀석인 J군도 한때는 사법시험 1차시험에 합격하여 2차시험 합격을 코앞에 두었지만, 2차시험일이 점차 다가오자 스트레스와 긴장감 때문인지 갑작스럽게 피씨방 출입이 많아 지더니 결국 온라임 게임에 빠져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 와도 피씨방을 떠날 줄 모르는 사태를 초래하고 결국 J군은 2차시험에 떨어지고 쓸쓸히 고시촌을 떠났다. 

 온라임 피씨게임이 대부분 환타지 게임이다 보니 특히 치열한 현실에 살고 있는 고시생들은 새로운 세계의 피씨게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특히 그 스트레스가 극대화되는 시험 막바지 준비단계에서는 더욱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신림동 고시촌의 피씨방은 특히 그 시간단 이용요금이 다른 곳이 피씨방보다 저렴하고 서비스가 좋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해야 한다.

고시촌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것들이 바로 피씨방과 DVD방들이다. 고시촌의 피씨방은 지금도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평일 오후에도 찾아가면 대부분 좌석들이 꽉 차있다. 그만큼 그 수요가 많다는 것이고, 자칫하면 온라인 게임의 유혹에 넘어가 고시생들의 젊음을 낭비할 수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고시촌에 성인 PC방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3. 고시생 유혹하는 BAR

  신림동 고시촌에 또 늘어나고 있는 것이 각종 술집과 이른바 토킹바이다. 여러분들이 아는 것 처럼 토킹바는 각종 양주나 맥주를 마시며 바에 있는 여종업원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구조이다.

고시생들이 대부분 혼자 공부하거나 독서실에서 말없이 공부하다 보니 외로움을 타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약점을 이러한 토킹바들이 파고 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고시생들이라면 주말에 간단한 맥주를 시켜 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칫 습관이 되어버리거나 중독이 되어 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대부분이 고시생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곳에 자주 들르게 되면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고 오히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여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고시촌에 이러한 고시생들을 유혹하는 BAR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듯 하다. 고시생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4.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라.
  
  고시촌에는 각종 피씨방 술집등이 오히려 서점보다 더 많이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혈기왕성한 고시생들을 유혹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시생들이 처음 고시촌에 들어왔을 때에는 단단한 각오를 하고 들어왔을 것이다. 고시촌은 오래 있으면 있을 수록 사람의 마음을 황폐화 시키고 외롭게 만드는 곳이다. 가능한 빨리 고시촌을 탈출하는 것만이 고시생의 힘든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부디 이러한 유혹들을 이겨내고 꼭 올겨울에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여 내년 봄에는 모두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