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못 쓰는 판사들(법조비사 2회)

법조비사 2014. 1. 2.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일본의 급작스러운 패망으로 그 동안 90% 이상 판사자리를 차지하던 일본인들이 물러나자 우리나라 사법부는 공백 사태가 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임시방편으로 부족한 법관을 보충하기 위해 법원 및 검찰의 서기,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들을 형식적인 시험을 거쳐 몇 개월간의 교육을 받게 한 다음 각자 판.검사로 임관시켰다.

그렇게 급하게 임명된 판사들이 능력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판결문은 일본의 판결문과 마찬가지로 주문, 사실과 쟁점, 증거 설시 및 이유 등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했는데 이에 대한 체계적인 예시문이나 서식이 없어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무런 능력도 없이 서기일을 하다 급하게 임명된 판사들 몇몇은 그러한 판결문을 작성할 능력이 안 되었기에 능력있는 법원의 서기가 판결문을 대신 작성해주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이에 판사로 임명되어 퇴직할 때까지 자기 스스로 판결문 한 번 안 쓴 판사도 있었으니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었다.

 이에 법원 서기가 민사 재판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진행하였고, 판결서의 주문 작성은 물론, 형사 재판의 유. 무죄, 형량의 결정도 서기가 전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법원 서기의 위상이 대단했다. 피고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먹고 무죄를 만들어 주거나 형량을 대폭 감경해 주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판사는 법정에 앉아 법원 서기가 작성해준 판결문을 앵무새처럼 읽는 역할만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수운 일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수운 에피소드도 있다. 법원 서기가 형사재판의 A라는 피고인의 가족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먹고 A에 대해 집행유예 판결을 해주기로 하고 판사에게 A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B라는 피고인에게는 징역 10월을 선고해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판사가 이를 헷갈려 반대로 선고하는 불상사가 생겨 피고인 A 가족이 법원에 찾아와 "내 돈 내놔라, 돈만 받아 먹고 약솔을 안 지키는 너 같은 놈은 당장 감옥에 가야한다"며 소란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일제시대 재판사진)

  또 이렇게 판결문을 한 번도 안쓴 판사가 법원 서기에게 판결문 작성을 모두 하도록 한 것이 미안해서인지 한번은 피고가 소장을 송달받고도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안니하고 법원에 출석도 아지 아니한 사건에 대해 자신이 이번에는 판결문을 쓰겠다고 소송기록을 집에 가지고 갔다가 소송기록을 분실하여 1년이 넘도록 사건을 방치하였다가 원고가 법원을 찾아와 소송을 제기한 후 1년이 지나로록 판결을 안 하는 이유가 뭐냐고 탄원하자 그제서야 법원 서기가 판결문을 급하게 작성한 사례도 있다. 위와 같은 사건은 무변론 원고 승소판결이라 하여 간단히 판결문을 작성하면 되는 것인데 그 사건의 판결문을 자기가 작성하겠다며 집에 가져가 분실까지 하였으니 아마도 그 판사는 무변론 원고 승소판결(당시 궐석판결)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 시대 검찰청 서기로 근무하다 해방 이후 간이법원판사임용시험에 합격한 판사는 역시 판결문을 제대로 작성할 능력이 없어 주로 형사 즉결사건을 전담하였는데 그나마 경범죄로 즉결로 넘어온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시민들로 부터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더불어 일제 시대 떄 아버지가 조선 총독부의 총독에게 호피를 선물하여 판사로 임명되었다고 알려진 판사는 민사사건에서 판결문을 작성하기 싫어서인지 모든 사건의 당사자에게 화해를 할 것을 권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월급에서 일당을 주겠다고 하면서 화해를 강요하기까지 한다.

  위와 같이 해방 이후 우리 법정에서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서기일을 하다가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채 판사로 임명되어 판결문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는 판사, 법원 서기가 작성해준 판결문을 앵무새처럼 낭독했던 판사, 그것이 해방 이후 우리 법원의 슬픈 현실이었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에 아무런 준비 없이 법조계도 그런 해방을 맞이하였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법조인 되기 참 쉬웠어요(법조비사 1회)

법조비사 2013. 12. 16.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급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은 당시 조선을 혼동스럽게 했다. 36년간 일제치하에 살아온 민중이나 일제와 협력해 민중을 착취해온 지배계급이나 급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혼동스러운 상황이었다.

법조계도 마찬가지였다. 8. 15. 해방 당시에는 일제치하에서의 마지막 변호사 시험이 치러지고 있었다. 해방 전날 민법, 행정법 시험을 보았고 해방 당일 오전까지 상법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정오 일왕의 예상하지 못했던 항복 선언은 변호사 시험을 중단하게 만들었고, 변호사 시험 응시자들은 오후 시험을 준비하다 그렇게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이에 변호사 시험을 보던 당시 응시자들은 자신들의 책임없이 시험이 중단된 것으니 응시자 전원에게 합격증을 교부할 것으로 요구하였고, 마침 급작스러운 해방으로 법조인력이 턱 없이 부족했던 미군정은 응시자 200여명 중 연락이 된 106명은 변호사 시험 합격증을 교부받고 그해 즉시 판검사로 임용되었고, 일부는 1947년 시행된 변호사 시험의 예비시험과 필기시험을 면제받고 형식적인 면접을 통하여 모두 변호사자격을 취득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며 일본인 판검사와 형무소관리 등을 모두 파면시키고 한국인으로 대처해야 했는데, 일제치하 당시 대부분의 판검사는 일본인으로 힌국인 판검사는 극히 드물어 대부분의 판검사를 새롭게 임명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미군정 법무국은 서울, 대구, 부산 등 각 지방별로 일제 때 판검사단과 변사호회에서 투표하여 고등법원장, 고등검사장, 지방법원장, 지방검사장 등을 추천해오면 그대로 임명했으며 부장판검사나 평판검사 등은 이들 단체의 추천에 의하거나 특별한 절차도 없이 법무국에서 이력서만 보고 직적 임명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검사 인원을 충당할 수 없자. 미군정은 법원 검찰 서기 중에서 법과 전문학교 이상을 졸업하고 서기 7년이상 근무한자를 변호사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판검사로 인명하였다.

당시 에피소드를 보면 판검사를 발령을 하루에 약 백명에서 이백명씩 미군정에서 영문타자로 찍어 군정장관의 결재를 받으면 그날 즉시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자신이 어느법원 부장판사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 나서야 아는 경우도 허다했다. 현재 판검사로 임관되기 위해서는 여러 시험과 수련을 거쳐야 가능한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 하나 해방 이후 판검사는 변호사 자격이 없어도 서기 경력만 있으면 하루에도 수백명씩 임명되는 그러한 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졸속으로 판사들이 임명되었으니 판사의 자질이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였고 판결문 하나 제대로 쓸 능력이 되지 아니하여 법원서기가 재판의 결론을 내리고 판결문을 대신 써주는 그런 사태가 빈번히 발생하였고, 판사 재직 동안 판결문 하나 써보지 못한 판사들도 허다했다.

이렇게 졸속적으로 판검사 변호사 등을 배출하였어도 법조인력은 여전히 부족하였고 결국 1947년 9월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이 치러지게 되었다. 당시 변호사 시험은 예비시험 합격자, 대학 예과 및 전문학교와 위원회가 동등 이상으로 인정하는 학교 졸업자로서 예비시험 면제자에 한하여 본 시험에 응시 할 수 있었는데, 시험과목은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국제사법, 현법 및 경제학 등이었다.

당시 시험의 특이한 점은 국민학교졸업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자가 상당수 변호사시험에 응시하엿다는 것이다. 제1회 시험은 응시자 807명 중 국민학교졸업자가 무려 156명으로 20%에 달했고, 제2회 시험은 응시자 875명 중 271명이 국민학교졸업자로서 응시자의 약 1/3에 육박하였다. 실제로 국민학교 졸업자 상당수가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당시 변호사 시험은 시험관리 제도가 지금처럼 엄격하지 아니하였던 모양이다. 제2회 변호사시험에 응시한 외무부 정보국장이 공무로 해외에 출장을 가 시험에 응시하지 못했으니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합격자 발표 후 이승만 대통령이 특명을 내려 위 공무원은 법무부장관 부속실에서 혼자 시험을 봐 최종합격하는 특이한 사례도 있었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 그 당시에는 통용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아무런 준비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해방이후 대한민국 법조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판검사는 변호사 자격조차 없는 서기들이 졸속 임명되었고 그런 자격없는 자들에 의해 원님재판이 빈번하였다. 모든 사회 전반에서 그러했겠지만 급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은 대한민국 법조사의 시작도 그렇게 혼동속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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