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해가는 고시촌을 지나며

좌충우돌변호사일기 2016. 2. 9. 00:02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지난 금요일 오후 인천에서 2시간에 걸친 지루한 증인신문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맡기고 서울로 향했다. 무심코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한참을 가던 나는 점점 눈에 익숙해지는 풍경에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그토록 내가 몸부림치며 벋어나고 싶어 했던 신림동 고시촌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나는 5년여 동안 거주하며 처절하게 시험준비를 했던 신림동 고시촌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신림동 고시촌은  항상 탈출하고 싶은 그러나 쉽게 탈출할 수 없던 절망과 한숨의 아물지 않는 상채기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는 찾기 싫었던 신림동 고시촌으로 네비게이션이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그렇게 사법시험 합격 후 처음으로 찾아간 신림동 고시촌의 모습을 차량 창문으로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난한 촌부의 아들이 사법시험에 도전하겠다고 한 것자체가 무리였을지 모른다. 몇년에 걸친 2차시험에서의 낙방은 나를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었고 거주지는 점점 가격이 낮은 신림동 산 끝으로 향했다. 더이상 새책을 살 여력이 되지 않아 헌책방에서 책을 사야했고, 학원 강의는 들을 여력이 되지 않아, 헌책방에서 테입을 사서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테입도 듣자 마자 바로 팔아야 했고 책도 시험이 끝나자 마자 다시 팔아야 했다.

그래도 시험은 계속 떨어졌고, 더이상 독서실비도 낼 여건이 되지 않아, 서울대 도서관에서 1,800원 짜리 식사를 하며 그렇게 버텼다. 하지만 나는 그해 4번째 2차시험에서 또 떨어졌다. 3번째 낙방까지는 무덤덤했다. 하지만 총점에서 3점 차이로 떨어진 4 번 째 낙방은 날 더이상 일어설 수 없게 만든 카운터 펀치 같았다. 그날 고시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고시원 옥상에서 눈물을 흘렸다. 갈 곳을 잃은 아이처럼 난 좌절해야만 했다. 그렇게 신림동 고시촌은 나에게 처절한 아픔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잊으려 했을지 모른다. 끄집어 내면 낼수록 아픈 과거가 들추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우연치 않게 스쳐 지나가는 신림동 고시촌의 모습은 더이상 아픈 상채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아픈 기억도 시간이 흘러가 뒤돌아보면 아름답게 포장되는 추억이 되는가 보다. 20대 후반 젊은 시절을 통채로 바친 고시촌의 모습은 어느덧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고시촌은 쇠락해가고 있었다. 합격자 발표일에 합격자 명단을 붙여 놓아, 수많은 고시생들이 서로의 명단을 확인하며 기쁨의 환호성과 아쉬움이 탄식이 교차하던 상원서적, 쿠폰을 가져가면 책을 할인해주었던 광장서적, 사법시험 2차시험 강의로 유명했던 고시학원 등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 하다. 나의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친 고시촌이 그렇게 쇠락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의 젊은시절 추억의 앨범하나가 날아가버리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고시촌 주거공간의 변천사

고시촌이야기 2012. 2. 10. 10: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는 아직도 수많은 고시생들이 각종 시험을 준비하며 거주하고있다. 고시촌하면 의례 생각나는 부분이 고시원일 것이다. 티비 드라마 등에서 고시생은 항상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고시원의 조그마한 방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낡은 추리닝을 입고 책상에 앉아 두꺼운 이른바 육법 전서를 하루 종일 외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제 신림동 고시촌에서 고시원은 점점 사라져가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시생들을 낡고 허름한 고시원에서 거주하지 않고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는 원룸이나 오피스텔에서 거주한다. 

  신림동 고시촌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인 90년대 중반에만 해도 고시촌에 거주하는 고시생들은 대부분은 하숙집이나 고시원에 거주하였다. 고시원의 경우에는 대부분 방은 규모가 아주 작았고, 화장실이나 샤워 시설은 당연히 공용이었다. 그리고 고시원의 경우 고시원 주인이 고시생을 위한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하숙집이라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한달에 약 30여만원을 내면 밥과 숙식이 제공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고시생들은 항상 공부때문에 체력이 딸리기에 고시원 주인 아주머니들은 고기 등 고열랑 음식을 고시생들에게 수시로 공급해주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고시 공부를 할 생각도 없었고, 법으로 밥을 벌어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시촌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 대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할 때 같이 하숙집에 있었던 형이 갑자기 행시 준비를 하겠다며 신림동 고시촌으로 떠났기 때문에 몇번 그 형이 거주하던 고시원을 찾아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 형을 찾아 가면 고시원 주인집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었던 그런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는 그래도 아직은 인정이 남아 있던 시기이다. 그때는 그렇게 신림동 고시촌에 고시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시기이다.

  더불어 고시촌의 고시원 생활이 답답하다며, 지방의 풍경이 좋은 절을 찾아가 공부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절에는 의례 고시생 몇명씩이 꼭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의 절로 소풍을 갔는데, 고시생 몇명이 어린 여선생님을 보자, 여선생님에게 그렇게 말을 걸려고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는 합격생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즉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인 유명한 절들은 항상 고시생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고시원의 영광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새롭게 유입되는 젊은 고시생들은 풍요로운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되지 아니하는 고시원을 선호하지 아니하였고 그들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이른바 원룸형태의 집들을 원했다. 쾌적한 환경을 선호하는 젊은 고시생들의 유입으로 고시원은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고시촌에는 원룸이나 오피스텔 등의 속속 들어섰다. 그리고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각종 시험정보 최신판례 등의 업데이트와 단절된 절도 고시생들이 더이상 찾지 않게되었다.

  원룸형태의 주거공간은 다 아는 것처럼 하나의 공간에 방, 화장실,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개인공간과 쾌적함을 중요시하는 고시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아주 작고 협소하기 때문에 이른바 '미니원룸'이라고 불리웠다. 삶이 더 여유로운 고시생들은 근처의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을 전세로 얻어 윤택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고시원은 그렇게 고시촌의 중심적인 주거공간의 위치를 넘겨주고, 신림동 고시촌 산꼭대기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직도 고시원은 고시생들의 유용한 공간이다. 특히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오랜기간 고시준비로 경제적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이른바 장수 고시생들에게는 고시원은 아직도 저렴하게 거주하며 공부할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 신림동 고시촌은 이제 서서히 고시생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법시험은 조만간 사라질 전망이고, 행시나 외시도 그 제도의 변경으로 우리가 불렀던 고시생들의 숫자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신림동 고시촌의 원룸이나 고시원에 거주하는 이들도 고시생에서 저렴하게 방을 잡기를 원하는 직장인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고시촌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신림동 고시촌이라는 이름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고시촌 입성기(고시촌 탈출기 1)

좌충우돌고시촌탈출기 2012. 2. 4.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서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였다. 비록 법학을 전공하기는 하였지만 나는 법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 보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학 1학년때 처음 접한 민법총칙은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 외계어 같은 각종 법률용어, 이론 등은 아 내가 괜히 법학을 전공했구나 하는 충격을 주었고 나는 1학년을 마치고 즉시 군대로 도피를 택했다. 그만큼 법학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강릉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열심히 싸우고, 제대를 하고 보니 대한민국은 듣지못했던 외환위기로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고, 평생 고용이 보장되었던 직장은 이제 실업자를 양산하며 수많은 가장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시골에서 힘겹게 자식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난 안정적인 무엇인가를 해야했고, 그렇게 택한 것이 결국 적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법시험 준비였다.

  그러나 쉽게 고시공부를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난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에 취해 신나게 거래에서 친구들과 "대한민국"을 외친 후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조용히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림2동 산꼭대기에 위치한 조용한 원룸에 정착했다. 그때가 아마도 2002년 가을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혼자 조용히 입성한 고시촌은 나에게 어색했고 쓸쓸했다. 생전 처음 고시식당에서 아무도 모르는 이들과 섞여 혼자 밥을 먹는 것이 가장 어색했고, 독서실에서 하루 종일 법서를 바라보는 것도 민법총칙의 충격에 군대로 도피했던 나에게는 신기하리 만큼 어색했다. 독서실 책상에 조용히 공부해달라며 음료수 하나와 메모지를 받은 것도 어색했다. 그러나 가장 어색한 것은 하루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 고립무원의 무인도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때였다.


쓸쓸함, 독서실에서 힘겨운 공부를 마치고 달빛을 조명삼아 산꼭대기 원룸을 꾸역꾸역 올라 갈때는 쓸쓸함을 넘어서는 표현할 수 없는 처량함이 밀려들어 왔다. 고시촌에서의 몇달의 생활을 통하여 수시로 받는 조용히 해달라는 메모지, 고시식당에서의 어색한 식사 등 등이 익숙해졌지만, 쓸쓸함과 외로움은 여전히 어색한 친구였다.

  더욱 나를 당황시키는 것은 역시 법학이라는 과목에서 오는 어색함이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니 모든 것들이 구멍이었다. 민법은 여전히 외계어처럼 들려오고, 형법총칙의 이론들은 내가 법을 공부하는 것인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했다.

 그러나 신림동 고시촌에 꿈을 품고 입성한 이상, 즉 사나이가 칼을 뽑은 이상 무라도 썰어야했다. 어떻게 해서든 1년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밤공부를 마치고 원룸에 돌아와 창문을 열면 신림동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 이곳을 내가 벗어 날 수 있을지, 아니면 패배자가 되어 쓸쓸히 퇴장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난 과연 신림동 고시촌을 탈출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의 신림동 고시촌 생활은 시작되었다.
 

고시생 떠나는 고시촌

고시촌이야기 2011. 12. 6. 07:00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 수많은 고시생들이 모여 청운의 꿈을 준비하며 치열하게 공부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신림동 고시촌이라는 이름은 추억의 옛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고시촌을 떠난후 오래간만에 신림동에 찾아갔다. 아니 신림동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이제 대학동 등으로 불리운다.

친구녀석이 아직도 고시촌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에, 신림동 근처에 갈일이 있어서 겸사 겸사 친구녀석도 볼겸해 고시촌을 찾았다. 여전히 고시촌에는 각종 고시학원이 있고, 두꺼운 법서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몇년 전 내가 있었을 때의 분위기와 무엇인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고시학원과 서점은 존재하지만 당시의 치열했던 그 무엇인가가 빠진느낌이랄까...

신림동 고시촌은 이제 변하고 있다. 로스쿨의 도입으로 인해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이들은 이미 많이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고시촌을 빠져나간 상태이고, 행시나 외시를 준비하던 이들도 고시제도의 변경으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고시생들로 꽉차 있던 원룸이나 고시원은 이제 공실이 많거나 싼 값의 거주지를 원하는 직장인들로 채워지고 있다. 고시생들이 줄어들자 각종 고시서적을 파는 서점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고, 고시생들의 식사를 싼값에 해결해주던 고시식당들은 고시생의 감소로 인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야반도주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녀석은 여전히 변함없이 두꺼운 법서와 싸움을 하고 있지만, 내 주의의 많은 선.후배들은 사라지는 고시제도로 인해 일부는 로스쿨에 들어가고, 일부는 직장을 잡아 취업하고, 일부는 고향에 내려가 장사를 하며, 그렇게 고시촌에서 사라져갔다.



오랫동안 공부하는 친구녀석이 안쓰러워 이제 너도 로스쿨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을 했지만, 녀석은 그 많은 등록금을 부담함 엄두가 나지 않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한다. 하기야 시골에서 조그마한 땅을 경작하며 사시는 부모님이나, 소방공무원을 하는 녀석의 동생이 엄청난 등록금을 부담하는 녀석의 로스쿨 학비를 마련해주기는 무리일 것이다. 지금도 근근히 과외, 독서실 총무 등을 하며 공부비용을 마련하고 있는 녀석에게 로스쿨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내가 수년동안 치열하게 공부했던 신림동 고시촌은 이제 서서히 고시생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술집, 직장인들이 들어찬 그런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수많은 청춘의 꿈, 아픔, 합격의 영광을 함께 했던 고시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추억의 낡은 앨범이 되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독서실에서 오전 공부를 마치고 친구녀석과 점심을 함께 했던 고시식당은  사라져 호프집이 되어버렸고, 한순간 밀려오는 고시생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피로를 달래주던 놀이터의 낡은 자판기의 인스턴트 커피는 새롭게 이주해온 이들의 고달픔 삶을 달래준다.

 

 나에게 수많은 아픔과 좌절을 안겨 주었던 고시촌은 항상 나의 기억속에 흑백사진의 잿빛 슬픔으로 기억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찾아온 고시촌은 나에게 과거 치열하게 살았던 나를 다시 볼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무엇일까 쇠락해가는 간이역의 아쉬움을 동시에 주었다.


고시촌의 무늬만 고시생들

고시촌이야기 2011. 1. 11. 07:18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는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많은 고시생들이 밤을 지새우며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한다.대다수의 고시생들은 독서실이나 고시원등에서 다른분야에 관심을 끊고 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나 신림동 고시촌에는 대다수의 고시생들과 다르게 그들의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하는 이른바 무늬만 고시생인 이들도 다수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각종 국가고시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에게 소중한 용돈을 받아서 유흥 등에 탕진하는 고시생들이 많이 있다.

 과거 내가 공부하기 위해 자리잡은 신림동 원룸에 몇달이 지난 후 옆방에 한 고시생이 들어왔다. 그 고시생은 처음 한달 정도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듯 하더니 그 후로 본색을 들어냈다. 매일 밤 친구들을 불러와 술파티를 벌였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늦은 밤 원룸에 들어오면 옆 고시생방은 술파티로 항상 시끄러웠다. 새벽까지 계속되는 시끌벅적한 소리로 잠을 자는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파티를 벌이니 낮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여자친구가 있는지 여자친구를 원룸에 데리고 와 또 수다를 떨었다. 그런 무늬만 고시생에게 한달에 한번씩 어머니가 찾아와 그 고시생 방을 청소하고 빨래거리를 가지고 가 빨아주었다. 생각같아서는 그 무늬만 고시생인 친구의 어머니에게 그 고시생의 평소 행태를 하나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무늬만 고시생의 부모님은 그 친구가 다른 고시생과 마찬가지로 매일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소중한 자식이 안쓰럽다고 생각을 했을 것인데, 그 무늬만 고시생은 공부는 뒷전이고 소중한 젊은 시절을 유흥에 낭비하고 있었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이러한 무늬만 고시생들이 많다. 많은 고시생들이 처음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고시촌에 들어오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막대한 공부분량앞에 질려버려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공부는 부업이고 유흥이 본업이 되어 버린 이들이 많다. 

 또 고시촌에 각종 술집, 바, 등의 유흥시설이 많다보니 혈기왕성한 젊은 고시생들이 부모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쉽게 그러한 유흥시설에 유혹되어 초심을 잃고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소중한 공부비용을 유흥비로 몇년이나 낭비하고 결국 고시촌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오랫동안 국가고시에 도전하였지만, 번번히 실패의 쓴잔을 맛본 이른바 장수생들은 더이상 갈곳이 없어 신림동 고시촌에 눌러 앉아 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미 나이는 들대로 들어 일반 기업에 취업할 수없어 신림동을 벗아나고 싶어도 벗아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도 많은 장수생들은 그들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지만, 또 다른 장수생들은 이미 공부의 뜻을 버렸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신림동에 고시생이라는 타이틀만 걸어두고 머무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본가에서 생활비가 올라오기 힘들어 가능한 신림동 산꼭대기에 있는 허름한 고시원에 머무르며 고시원이나 독서실 총무, 학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생계비를 마련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아르바이트 등으로 공부시간이 부족하여 공부는 하루에 채 몇시간을 하지 못하니 합격의 길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고시생이라는 명칭은 그들에게 하나의 직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이름만 고시생인 이들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무늬만 고시생들은 오늘도 그들의 소중한 젊은 시절을 아무런 의미없이 낭비하며 보낸다. 그러한 이들은 몇년을 낭비한 후에야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는다.

지금 국가고시를 위해 신림동 고시촌 입성을 꿈꾸는 자가 있다면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할 것을 권하고 싶다.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와 합격의 영광을 차지하여 웃으며 떠나는 이들은 10명 중 한명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이들은 실패의 쓴 경험을 안고 떠난다. 그만큼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오기로 결정을 했다면 그 누구보다 성실히, 열정적으로 그들의 꿈을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안경이 부러진 채 사법시험 본 사연

고시촌이야기 2011. 1. 5. 07:49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고시촌에 입성하여 그 해 겨울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비록 경제적 환경이 넉넉하지 못하여 학원은 수강할 수 없었지만 강의테입으로 대체하여 유명강사의 강의도 들었고, 미니원룸과 독서실을 왔다갔다하며 단조로운 생활을 이겨내고 가능한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인지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와도 이전처럼 긴장감과 두려움은 덜했다. 오히려 때로는 시험을 빨리 봐서 내 실력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물론 아주 잠깐이지만,,,,)

 그리고 어느덧 매서운 겨울 바람이 잠잠해지고 봄의 기운이 찾아 올 무렵 사법시험1차시험 전날이 되었다. 그해 시험은 2003년이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법률저널 게시판에 가보니 나와 똑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 글을 올린 것이 있어 다소 참 우습기도 했는데 법률저널 게시판에 보니 안경이 부러져 안경없이 시험을 보았다고 하소연 한 글이 있었다.

그런데 나도 그 해 시험에서 똑같은 경험을 한 것이다.난 중학교때부터 안경을 썼기 때문에 눈이 상당히 나쁘다. 흔해 말해서 안경을 벗으면 거의 장님 수준이다. 그러한 내가 그 해 사법시험 1차시험을 안경없이 본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시험전날 나는 독서실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밤 10시경에 숙소인 미니원룸으로 왔다. 역시 시험전날이라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숙소에 들어와 대충 씻고 내일 시험장에 가지고 갈 책 등 준비물을 정리하고 나니 11시가 다 되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영 오지 않았다. 시험장에 갈려면 그래도 7시경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영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시험장에서 실수하면 어떡하지,또 떨어지면 하는 잡생각만 머리속에서 맴돌고, 또 눈을 뜨면 얼릉 자야지 하며 다시 눈을 감고를 반복하며 시간은 12시, 1시,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영 잠이 오지 않아. 군대시절 이후 끊었던 담배를 물고 창문을 열고 한눈에 내려보이는 신림동 전경을 바라보았다. 고요함이 오히려 더 나의 잠을 방해했다. 그렇게 뒤척이다 난 안경을 침대아래에 두고 새벽3시경에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6시경에 눈을 가까스로 떴다. 잠을 못자서인지 머리가 빙빙돌고 컨디션이 별로 안좋았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침대 아래 방바닥을 밟았는데 무엇인가 단단한 것이 밟히고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경이 두동강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절단나버렸다. 순간 정신이 번쩍들고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주 허탈한 웃음....순간 든 생각은 올해 시험은 또 이렇게 어이없이 망치는 구나 하는 것과 모르겠다.시험보러 가지말까...등등의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갔다.

잠시 놓았던 정신줄을 다시 잡고 방을 뛰쳐나가 안경점을 찾아 갔지만 이른 아침이 문연 안경점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편의점을 찾아가 순간 접착제를 구해 와서 절단난 안경을 접착시키려고 했지만 절단면이 너무 매끄러워선지 안경은 야속하게 계속 떨어져 나갔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이제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시험을 포기할까 하는 고민도 했지만 일단 시험장에 가보기로 했다.

모든 것이 뿌옇게 초점이 잡히지 않은 채 보였다. 버스번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택시를 잡아 타고 가야 했는데, 그때서야 시험당일 날 신림동에 보이는 택시들은 대부분 예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붙잡는 택시마다 예약되어 있다고 승차를 거부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는데 당황스러웠다. 간신히 버스정류장에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버스를 타고 신림역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을 주의깊게 들어야 했다. 그때서야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지금 내모습이 너무나 황당하여 계속 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간신히 시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험은 시작되었다. 시험지도 잘 안보였다.가능한 시험지와 눈을 밀착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글자한자한자를 세심하게 보며 시험을 치루었다. 그때의 모습이 시험감독관도 이상했는지 세심히 나를 관찰했다.

한자 한자 집중해서 보아야 했기 때문에 피로감이 더했다. 오전 시험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담배 하나를 사 군대제대 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폈다. 역시 식후에 먹는 담배맛이 제일이었다.솔직히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점심시간에 다시 급하게 안경을 맞출 시간은 있었지만 그냥 만사가 귀찮았다. 이미 의욕상실이라고 할까....

 그리고 다시 오후 시험을 보았다. 자포자기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험에 대한 긴장감도 이미 사라졌다. 긴장감이 사라지니 어려운 문제 아리송한 문제도 그냥 맘편하게 고민없이 답이라고 생각되는 지문에 정답을 체크했다. 역시 시험은 긴장없이 보아야 해 하면서 말이다.시험을 잘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다시 한번 올림픽정신으로 끝까지 해보자 뭐 그런 생각이었다. 시험지와 다시 내 눈을 밀착시키고 한자한자 글자를 세어가며 시험을 보았다.

악몽같은 하루가 그렇게 끝났다. 시험장을 나오며 다시 담배를 물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도 잘 안보였다. 내 불투명한 미래처럼 모든 것이 흐리멍텅했다. 가까스로 신림동에 와 안경점에 갔다. 그리고 한풀이라도 하듯 내 능력을 뛰어 넘는 비싼 안경을 샀던 기억이 있다.

 작은 내 안식처 미니원룸에 와 그냥 잠이 들었다. 채점이고 뭐고 할 기력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도 너무 웃겨서 웃음만 나왔다. 지금생각해도 웃긴 상황이 아니던가. 며칠후 가답안을 보고 채점을 해보긴 했다. 그러나 점수가 생각보다 잘나왔다. 정확히는 기어나지 않지만 81.5점인가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당시 컷트라인이 내 기억에는 82점이었을 것이다.그런데 81.5점이었다. 아마  그 당시 합격자 발표전까지 컷트라인 공방이 꽤 있었던 기억이 있다.당시에는 좀 아쉬웠다. 만약 안경을 끼고 정상적인 컨디션에서 시험을 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 나의 점수대가 가장 불안한 점수대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불합격이었을까?

아니. 나는 합격했다. 컷트라인이 82점인대 어떻게 합격했냐고? 안경을 안쓰고 어려운 상황에서 시험을 끝까지 마친 것에 대해 법무부가 이를 참작하여 합격을 시켜주었다. 무슨 말이냐고..... 당시 경제법을 선택과목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경제법 한문제가 복수정답이 인정되어 0.5점이 올라가버렸다. 그래서 정확히 컷트라인 82점으로 붙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꼴찌로 1차시험에 합격했다.(물론 다음해 2차시험에는 어이없이 떨어졌지만...,,) 컷트라인으로 붙는 짜릿함은 아무도 모른다. 마치 수석으로 붙은 느낌이라고 할까....^^ 안경이 부러진 어이없는 상황에서 시험으로 포기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시험을 보고 드라마같이 꼴찌로 합격을 해버렸다.지금생각해도 내 인생의 역사 중에게 가장 재밌는 상황중에 하나이다.

다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 무엇인가 결과물이 생기는 모양이다. 우리 다시 힘들고 지금은 괴롭더라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말고 도전합시다. 오늘은 어둡고 힘들더라도 내일은 태양이 다시 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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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촌 입성기

고시촌이야기 2010. 12. 29. 08:21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은 어느덧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긋지긋했던 고시촌을 탈출한지도 이제 2년을 넘어서고 있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아직도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각종 시험준비생들이 치열한 시험준비를 하며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고시생들이 모두 꿈을 이루어 고시촌을 탈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고시촌을 떠나는 이들이 더욱 많다. 그리고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떠나는 이들의 빈 공간을 새로운 이들이 채운다.

 신림동 고시촌에 내가 처음 입성한 때는 2002년 겨울이었다. 2002년은 월드컵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웠다. 나 또한 대학에서 월드컵 기간동안 흥분하며 광란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자 현실로 돌아왔다. 

 법대를 나온 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것인가? 취업을 할것인가? 솔직히 대학을 다니면서 사법시험을 몇번 도전했지만 결과는 1차시험에도 떨어졌다. 솔직히 열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떠밀리듯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무엇인가? 내가 갈길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무작정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다. 우선 방을 알아 보아야 했는데 신림9동은 너무나 사람들이 많아 평소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용한 신림2동의 산꼭대기에 있는 조용한 미니원룸에 자리를 잡았다. 

 신림동 고시촌(지금은 대학동으로 변경되었다고 함)은 보통 신림2동과 9동으로 나누어진다. 예전에는 9동에 유명학원들이 몰려 있어 대부분의 고시생들이 신림9동에 몰려 살고 또 편의시설, 복사집등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신림2동에 유명학원들이 옮겨 오면서 독서실, 편의시설도 신림2동에 많이 생겼다.

  내가 선택한 미니원룸은 우선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경치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나즈막한 산이 자리잡고 있어 기분이 울적하거나 하면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름에는 정말 힘들다. 스키장 활강 코스같은  경사로 인해 여름에 학원이나 독서실이라도 나갔다가 복귀할 때에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리고 겨울에 눈이라도 쏟아지면 내려갈 생각을 안하는 것이 속편하다. 굳이 내려갈려면 아이젠이라도 신고 가야 할 정도이다. 그렇게 난 2002년 매서운 바람이 부는 12월 겨울 어느날 신림동 고시촌에 자리를 잡았다.


 딱 3년을 기약했다. 3년이면 충분히 고시촌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능력을 무시한 오만으로 판명되었다. 3년이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신림동 고시촌 생활이 5년이상이 되어 버릴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고시촌의 첫날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잊지 못하는 것 처럼 그날의 기억은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골집을 떠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잠못들며 밤새 뒤척거리던 자취방의 첫경험, 군대입대해서 잠못들며 한숨만 푹푹내쉬던 훈련소에서 첫밤, 마치 고시촌의 첫날은 그런 것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왜 그렇게 매섭게 몰아치던지, 창가를 무서운 소리를 내며 때렸다. 밤하늘은 달빛, 별빛 하나 없어 블랙홀 같은 어둠이 꽉 차있었다. 두꺼운 법서를 책장에 정리고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릴적 추억들, 대학에 입학했던 기억, 부모님, 장래에 대한 고민, 낯선 곳에 있는 어색함 등등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고시촌의 첫날밤은 뒤척거림과 매서운 겨울바람, 한숨으로 무언지 모를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린 소녀의 뺨과 같이 흘러 가고 있었다.

고시생 유혹하는 고시촌의 환경

고시촌이야기 2010. 12. 14. 12:04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의 연말은 바쁘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등 각종 시험의 1차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시생들은 독서실이나 고시원에서 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나 일부 고시생들은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고 고시촌이 유혹하는 유혹의 몸짓에 넘어가 안타까운 젊음을 낭비하기도 한다.

1. 불법 성인 업소들
 
 한때 고시촌에는 xxx 스포츠 마사지라는 이름을 건 업소들이 우우죽순 들어섰다. 대부분 짐작을 하겠지만 이러한 업체들은 건전한 스포츠 마사지 업체가 아닌 젊은 남성을 유혹하는 성인 업소들이다. 고시촌의 특성상 젊은 미혼의 남성들이 많이 거주하는 관계로 많은 고시생들이 이런 불법 업소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대대적인 단속으로 인해 이러한 업체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들었지만, 여전히 몇몇업체들은 남아 있어 고시생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위해 고시촌에 온 이상 이러한 유혹에는 참겨 이겨 낼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2.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게임이 있는 PC방
   
   아무래도 고시촌에서 대부분의 고시생들이 독서실과 고시원등을 오가며 작은 공간에 갇쳐 공부를 하다보니 고시생들은 스트레스가 많다. 그래서 많은 고시생들이 피씨방등을 찾아 간단한 게임이나 웹서핑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나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이용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오히려 공부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자칫하다보면 게임에 중독이 되어 버려 소중한 시절을 낭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리니지, 워크래프트등 중독성이 강한 온라인 게임에 중독되어 독서실 대신에 하루종일 피씨방에 출근하여 게임 삼매경에 빠진 고시생들이 피씨방에 가면 많이 목격된다. 

 대학 후배 녀석인 J군도 한때는 사법시험 1차시험에 합격하여 2차시험 합격을 코앞에 두었지만, 2차시험일이 점차 다가오자 스트레스와 긴장감 때문인지 갑작스럽게 피씨방 출입이 많아 지더니 결국 온라임 게임에 빠져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 와도 피씨방을 떠날 줄 모르는 사태를 초래하고 결국 J군은 2차시험에 떨어지고 쓸쓸히 고시촌을 떠났다. 

 온라임 피씨게임이 대부분 환타지 게임이다 보니 특히 치열한 현실에 살고 있는 고시생들은 새로운 세계의 피씨게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특히 그 스트레스가 극대화되는 시험 막바지 준비단계에서는 더욱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신림동 고시촌의 피씨방은 특히 그 시간단 이용요금이 다른 곳이 피씨방보다 저렴하고 서비스가 좋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해야 한다.

고시촌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것들이 바로 피씨방과 DVD방들이다. 고시촌의 피씨방은 지금도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평일 오후에도 찾아가면 대부분 좌석들이 꽉 차있다. 그만큼 그 수요가 많다는 것이고, 자칫하면 온라인 게임의 유혹에 넘어가 고시생들의 젊음을 낭비할 수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고시촌에 성인 PC방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3. 고시생 유혹하는 BAR

  신림동 고시촌에 또 늘어나고 있는 것이 각종 술집과 이른바 토킹바이다. 여러분들이 아는 것 처럼 토킹바는 각종 양주나 맥주를 마시며 바에 있는 여종업원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구조이다.

고시생들이 대부분 혼자 공부하거나 독서실에서 말없이 공부하다 보니 외로움을 타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약점을 이러한 토킹바들이 파고 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고시생들이라면 주말에 간단한 맥주를 시켜 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칫 습관이 되어버리거나 중독이 되어 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대부분이 고시생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곳에 자주 들르게 되면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고 오히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여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고시촌에 이러한 고시생들을 유혹하는 BAR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듯 하다. 고시생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4.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라.
  
  고시촌에는 각종 피씨방 술집등이 오히려 서점보다 더 많이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혈기왕성한 고시생들을 유혹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시생들이 처음 고시촌에 들어왔을 때에는 단단한 각오를 하고 들어왔을 것이다. 고시촌은 오래 있으면 있을 수록 사람의 마음을 황폐화 시키고 외롭게 만드는 곳이다. 가능한 빨리 고시촌을 탈출하는 것만이 고시생의 힘든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부디 이러한 유혹들을 이겨내고 꼭 올겨울에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여 내년 봄에는 모두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고시촌을 쓸쓸히 떠나는 친구에게.......

고시촌이야기 2010. 4. 10. 11:31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이제 봄인가보다
얼마전까지 차갑게 몰아치던 차가운 늦겨울 바람은 이제 더이상 버틸수 없다는듯 사그러 들었다.진해에는 벚꽃이 활짝피었고.개나리는 노란 봄소식을 전해 온다.변호사시보를 하고 있는 법무법인에서 간단히 출근하여 업무를 마치고 집에서 멍때리고 있을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학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녀석이었다.지금도 신림동 고시촌에 시험준비를 하고 있는 녀석이이다.대학때부터 서로 하숙집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이것저것 볼것 못볼것 다본 친한녀석이었다.그러나 운이 좋게 실력도 없는 내가 시험에 먼저 합격하고나서부터 그녀석의 자존심을 건디릴까봐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하는...어설픈 사이가 되어버렸다.

 너무나 반가웠기에 전화벨이 울리자 마자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녀석과 간단한 안부를 나누었다.그리고 녀석은 나에게 말했다.이제 신림동을 떠나야겠다고....;;
나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녀석의 결정을 따를수밖에 없었다. 녀석도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린것일 것이다.그러나 찹찹한 마음은 금할수 없었다.

 녀석은 신림동을 떠나 당분간 강남쪽에 고시원에 있기로 결정했다며 이삿집을 옮겨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나는 알았다고 답했다.그리고 얼마전에 구입한 싸구려 중고승용차를 끌고 신림동을 향해 달려갔다.

 자유로를 따고 달리는 동안 녀석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대학교 입학해서 유난히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와 다가왔던 녀석.그리고 난 녀석과 단짝이 되었다.하숙집에서 같이 라면도 끓여먹고 당시에 유행하던 컴퓨터  게임 '삼국지'에 빠져 같이 수업을 빼먹었던 기억.중간고사에 벼락치기 공부하며 날밤을 지새웠던 기억....신림동 고시촌에서 싸구려 고시식당밥을 먹으면서도 행복해했던 기억........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에 운전을 하니.어느덧 신림동 고시촌에 도착했다.녀석이 있는 곳은 신림9동에 있는 산꼭대기 고시원...다닥다닥 붙어있는 고시원과 간혹 힘겹게 언덕길을 올라가는 사람들...독서실앞에 잠깐 휴식을 취하며 서성거리는 이들....변한것은 없다. 월 15만원에 닭장같은 공간에 그들의 피곤한 몸을 맡긴다....

  녀석이 보였다.차에서 내려 녀석과 반갑게 악수했다.무슨말을 할까.거의 2달만에 보는 녀석인데..특별히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그져 묵묵히 그녀석이 거주했던 고시원방으로 향해 짐을 옮겼다.녀석의 짐은 간촐했다.이미 시험을 더이상 안보기로 결정했는지 돈이 될만한 시험관련책은 헌책방에 모두 팔아버렸다.두꺼운 민법 기본서와 그외 법서 몇권.여름,겨울 구별없는 얇은 이불,옷몇가지...그것이 전부였다.

  녀석의 짐을 차에실고 녀석과 함께 차에 타고 신림동 고시촌을 빠져나왔다.녀석은 아쉬움이 남는듯 창가를 통해 점점 사라져가는 고시촌의 풍경을 바라보았다.여전이 길게 줄이 늘어선 고시학원.다닥다닥붙어있는 각종 미니원룸과.고시원.그리고 독서실...그곳에는 아직도 꿈을 간직한체  많은 이들이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녀석처럼.아쉬움을 간직한체..떠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한참을 달려 녀석이 새롭게 자리잡기로 한 강남의 고시원에 도착했다.녀석은 당분간 이고시원에서 총무로 지내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고 한다.고시원은 신림동의 15만원짜리 고시원보다 훨씬 사정이 안좋아 보였다.공간은 너무 협소했다. 미로같은 방들..누울자리조차 부족해보이는곳....간단히 짐을 정리해놓으니 공간은 더 협소해 보였다.그나마 신림동 고시촌의 고시원이 훨씬 넓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정리를 마치고 녀석과 저녁을 먹었다.지글지글 타오르는 삼겹살...녀석은 쓰디쓴 소주만 연거푸 마신다. 멋진 변호사가 되고 싶어했던 녀석의 어릴적 꿈을 이제 포기하기로 했으니 그 심정이 쓰라릴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다.녀석은 잘모르겠다고 한다. 공기업이나.공무원등을 알아볼까 하는데...그것도 잘모르겠단다.

 녀석에게 로스쿨이라도 응시해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녀석의 경제적 형편을 잘 알고 있기때문에 그것도 권할수 없었다.녀석은 이삿짐을 옮겨줘서 고맙다고 했다.그러나 무엇이 고마운것일까?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인간은 꿈을 먹고 살아가는 동물이기에...하지만 난 녀석이 지금 이 작은 꿈을 포기하지만 보다 원대한 꿈을 이룩할 녀석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착한녀석.너무나 착하고 인간적인 녀석이라는 것을 알기에....

 녀석과 삼겹살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헤어졌다.녀석은 마지막으로 내손을 꼭 잡으며 고맙다고 했다. 무엇이 고마운 걸까? 난 녀석에게 해준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녀석에게 난 무엇인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그러하지 못하고 "다음에 다시 보자"는 무덤덤한 말을 하고 떠났다.



  난 신림동 고시촌에 오래동안 있었지만.그 신림동 고시촌만의 이상한 기운이 싫었다.고시촌의 달은 슬펐다.누군가의 아픈 사연을 집어 삼켜버린듯한 저 밝은 달빛의 우울한 모습...

 녀석이 떠난 자리에는 아마 새로운 고시생이 차지하고 있을것이다. 그러나 반면 녀석처럼 그렇게 그곳을 조용히 아쉬움을 뒤로 한체 떠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슬퍼하지 말자.비록 지금 아쉬움의 발걸음에 저 처량하게 걸린 달처럼 슬프고 가슴아프겠지만..그들에게는 더 밝고 희망찬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친구야.우리 슬퍼하지 말자.지금의 쓰디쓴 상처가 언젠가는 아물어 새로운 희망의 봄을 노래하는 순간이 올것이다.기나긴 춥고 시린 겨울이 있어야만 봄은 소중히 기억될것이다.우리의 인생에 한순간의 실패에 두려워 해서는 안될것이다. 우리는 아직 젊고.해야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고시촌의 공부벌레들....

고시촌이야기 2009. 8. 9. 10:31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지난 6월말 사법시험2차시험이 끝났다.그당시 난 연수원1학기 시험을 보고 있었고 내가 아는 몇몇 학교 선배나 후배 그리고 친구들은 사법시험2차시험을 보았다. 얼마전까지 나또한 그들의 틈에 끼어 사법시험2차시험을 준비하였기에 무어랄까 연수원시험이 익숙하지 않고 어색한 느낌이었다.

 다른 한편 그들의 인생을 걸고 팽팽한 긴장감속에 4일에 걸친 2차시험을 준비하는 그들을 생각하니 나또한 숨이 탁 막힐것같은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합격생들이 마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거대한 트라우마처럼 때때로 2차시험을 땀을 뻘뻘흘리며 치는 꿈을 꾼다고 한다. 마치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들이 다시 군대가는 꿈을 꾸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는 일종의 그러한 악몽과 같은 것이다.

 그만큼 사법시험2차시험은 고통스럽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힘든것이다. 고시촌에는 그러한 자신의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이들이 모인곳이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지독한 공부벌레들이 많다.

지금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인 고승덕 변호사의 합격기는 고시촌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이들이 한번씩은 읽어보는 그야말로 베스트 셀러이다. 고승덕 변호사의 처절한 공부방법이 많은 고시생들에게 공부의 의지를 불태우게 하기 때문이다. 고승덕 변호사는 합격기에서 본인이 머리가 좋은 축에 들이 않기 때문에 남들이 그 책을 3번보면 자신은 10번이상 본다는 각오로 자신의 모든것을 공부에 투자했다고 한다.잠을 못자고 공부를 하면 정신이 멍해져 잠은 7시간정도를 잤지만 그외의 모든시간은 공부에 투자했다고 한다. 심지에 식사시간이 아까워 음식물을 잘게 쪼개 바로 입에 털어넣고 공부를 했다고 하니 그의 공부의지가 얼마나 대단한것인가를 알수 있다.

또 몇년전 최연소 합격생으로 유명해져 책까지 쓴 분의 공부방법 또한 회자된적이 있다. 그분은 1차시험을 단기간에 합격하고 그어렵다는 2차시험 또한 생동차로 합격해 유명세를 탄분이다.그분의 공부방법은 그야말로 무식하다 할정도의 일반인은 따라하기 힘든 공부방법이었다.

각 과목의 문제집을 되도록 많이 구해 반복해서 보는 방법이었다.어찌보면 상당히 간단한 방법인데.달리 보면 상당히 무식하고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그러나 그분은 일단 그날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문제집을 다보기로 결단을 내려면 밤을 세우는 한이 있어도 꼭 다보는 그러한 짐념을 가진분이었다. 그러한 끈기가 있었기에 최연소 합격이라는 영광을 차지한 것이기도 할것이다.

그밖에 고시촌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부하는 그들의 모든것을 바쳐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공부벌레들이 많다.고시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공부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고시공부는 끈기를 요하는 공부이다.

최근에는 계속되는 판례등의 증가로 기본서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고시생들을 더욱 힘겹게 한다. 그만큼 볼분량이  많아져 더욱 부지런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이른바 기상스터디를 구성하기도 하며 기상을 강제하고.그이후에는 생활스터디등을 함께 하며 그들의 생활을 통제할려고 노력한다. 그리고는 책상에 앉아 기본서와 문제집 또는 판례집등을 함께보며 의자에서 화장실이나 식사하러 갈때를 제외하고는 일어나지 않는다.그리고 늦은 밤 혹은 새벽이 되어서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들의 작인 안식처인 고시원이나 미니 원룸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그들이지만 합격의 영광은 일부고시생에게 돌아가는 것또한 사실이다.매년 약 3만여명의 사법시험준비생들이 1차시험을 준비하지만 1차시험에 합격하는 이들은 약 2천500여명에 불과하다. 또 그합격생중에서 최종합격의 영광을 누리는 이들은 약 1000여명에 불과하다.매년 3만여명의 응시생중 1천여명만의 합격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모두 한때 자기 고향등지에서 공부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재들이었기에 그경쟁은 더욱 치열할수 밖에 없는 것이고 합격의 길은 험난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합격의 기쁨보다 불합격이라는 가슴속의 상처를 안고 고시촌을 쓸쓸히 떠나는 냉혹한 세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도 법조인의 꿈을 품고 수많은 고시생들이 신림동 고시촌을 향할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치열하게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겨내며 두꺼운 법서와 사랑에 빠질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이들이 합격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승엽 선수가 말한것처럼 "혼을 담은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진리가 통하는 것이다. 고시촌의 새벽은 열정을 다해 공부하는 그들로 인해 불이 꺼지지 않는다.

합격의 영광의 비밀은 간단하다.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그노력에 혼을 담아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사법시험 합격에 지름길은 없다.그저 묵묵히 최선을 다해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