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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12.29 고시촌 입성기 3

고시촌의 무늬만 고시생들

고시촌이야기 2011. 1. 11. 07:18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에는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많은 고시생들이 밤을 지새우며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한다.대다수의 고시생들은 독서실이나 고시원등에서 다른분야에 관심을 끊고 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나 신림동 고시촌에는 대다수의 고시생들과 다르게 그들의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하는 이른바 무늬만 고시생인 이들도 다수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각종 국가고시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에게 소중한 용돈을 받아서 유흥 등에 탕진하는 고시생들이 많이 있다.

 과거 내가 공부하기 위해 자리잡은 신림동 원룸에 몇달이 지난 후 옆방에 한 고시생이 들어왔다. 그 고시생은 처음 한달 정도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듯 하더니 그 후로 본색을 들어냈다. 매일 밤 친구들을 불러와 술파티를 벌였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늦은 밤 원룸에 들어오면 옆 고시생방은 술파티로 항상 시끄러웠다. 새벽까지 계속되는 시끌벅적한 소리로 잠을 자는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파티를 벌이니 낮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여자친구가 있는지 여자친구를 원룸에 데리고 와 또 수다를 떨었다. 그런 무늬만 고시생에게 한달에 한번씩 어머니가 찾아와 그 고시생 방을 청소하고 빨래거리를 가지고 가 빨아주었다. 생각같아서는 그 무늬만 고시생인 친구의 어머니에게 그 고시생의 평소 행태를 하나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무늬만 고시생의 부모님은 그 친구가 다른 고시생과 마찬가지로 매일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소중한 자식이 안쓰럽다고 생각을 했을 것인데, 그 무늬만 고시생은 공부는 뒷전이고 소중한 젊은 시절을 유흥에 낭비하고 있었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이러한 무늬만 고시생들이 많다. 많은 고시생들이 처음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고시촌에 들어오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막대한 공부분량앞에 질려버려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공부는 부업이고 유흥이 본업이 되어 버린 이들이 많다. 

 또 고시촌에 각종 술집, 바, 등의 유흥시설이 많다보니 혈기왕성한 젊은 고시생들이 부모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쉽게 그러한 유흥시설에 유혹되어 초심을 잃고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소중한 공부비용을 유흥비로 몇년이나 낭비하고 결국 고시촌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오랫동안 국가고시에 도전하였지만, 번번히 실패의 쓴잔을 맛본 이른바 장수생들은 더이상 갈곳이 없어 신림동 고시촌에 눌러 앉아 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미 나이는 들대로 들어 일반 기업에 취업할 수없어 신림동을 벗아나고 싶어도 벗아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도 많은 장수생들은 그들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지만, 또 다른 장수생들은 이미 공부의 뜻을 버렸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신림동에 고시생이라는 타이틀만 걸어두고 머무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본가에서 생활비가 올라오기 힘들어 가능한 신림동 산꼭대기에 있는 허름한 고시원에 머무르며 고시원이나 독서실 총무, 학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생계비를 마련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아르바이트 등으로 공부시간이 부족하여 공부는 하루에 채 몇시간을 하지 못하니 합격의 길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고시생이라는 명칭은 그들에게 하나의 직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이름만 고시생인 이들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무늬만 고시생들은 오늘도 그들의 소중한 젊은 시절을 아무런 의미없이 낭비하며 보낸다. 그러한 이들은 몇년을 낭비한 후에야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는다.

지금 국가고시를 위해 신림동 고시촌 입성을 꿈꾸는 자가 있다면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할 것을 권하고 싶다.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와 합격의 영광을 차지하여 웃으며 떠나는 이들은 10명 중 한명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이들은 실패의 쓴 경험을 안고 떠난다. 그만큼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오기로 결정을 했다면 그 누구보다 성실히, 열정적으로 그들의 꿈을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고시촌 입성기

고시촌이야기 2010. 12. 29. 08:21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은 어느덧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긋지긋했던 고시촌을 탈출한지도 이제 2년을 넘어서고 있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아직도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각종 시험준비생들이 치열한 시험준비를 하며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고시생들이 모두 꿈을 이루어 고시촌을 탈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고시촌을 떠나는 이들이 더욱 많다. 그리고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떠나는 이들의 빈 공간을 새로운 이들이 채운다.

 신림동 고시촌에 내가 처음 입성한 때는 2002년 겨울이었다. 2002년은 월드컵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웠다. 나 또한 대학에서 월드컵 기간동안 흥분하며 광란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자 현실로 돌아왔다. 

 법대를 나온 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것인가? 취업을 할것인가? 솔직히 대학을 다니면서 사법시험을 몇번 도전했지만 결과는 1차시험에도 떨어졌다. 솔직히 열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떠밀리듯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무엇인가? 내가 갈길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무작정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다. 우선 방을 알아 보아야 했는데 신림9동은 너무나 사람들이 많아 평소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용한 신림2동의 산꼭대기에 있는 조용한 미니원룸에 자리를 잡았다. 

 신림동 고시촌(지금은 대학동으로 변경되었다고 함)은 보통 신림2동과 9동으로 나누어진다. 예전에는 9동에 유명학원들이 몰려 있어 대부분의 고시생들이 신림9동에 몰려 살고 또 편의시설, 복사집등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신림2동에 유명학원들이 옮겨 오면서 독서실, 편의시설도 신림2동에 많이 생겼다.

  내가 선택한 미니원룸은 우선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경치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나즈막한 산이 자리잡고 있어 기분이 울적하거나 하면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름에는 정말 힘들다. 스키장 활강 코스같은  경사로 인해 여름에 학원이나 독서실이라도 나갔다가 복귀할 때에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리고 겨울에 눈이라도 쏟아지면 내려갈 생각을 안하는 것이 속편하다. 굳이 내려갈려면 아이젠이라도 신고 가야 할 정도이다. 그렇게 난 2002년 매서운 바람이 부는 12월 겨울 어느날 신림동 고시촌에 자리를 잡았다.


 딱 3년을 기약했다. 3년이면 충분히 고시촌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능력을 무시한 오만으로 판명되었다. 3년이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신림동 고시촌 생활이 5년이상이 되어 버릴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고시촌의 첫날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잊지 못하는 것 처럼 그날의 기억은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골집을 떠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잠못들며 밤새 뒤척거리던 자취방의 첫경험, 군대입대해서 잠못들며 한숨만 푹푹내쉬던 훈련소에서 첫밤, 마치 고시촌의 첫날은 그런 것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왜 그렇게 매섭게 몰아치던지, 창가를 무서운 소리를 내며 때렸다. 밤하늘은 달빛, 별빛 하나 없어 블랙홀 같은 어둠이 꽉 차있었다. 두꺼운 법서를 책장에 정리고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릴적 추억들, 대학에 입학했던 기억, 부모님, 장래에 대한 고민, 낯선 곳에 있는 어색함 등등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고시촌의 첫날밤은 뒤척거림과 매서운 겨울바람, 한숨으로 무언지 모를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린 소녀의 뺨과 같이 흘러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