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촌 입성기

고시촌이야기 2010. 12. 29. 08:21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신림동 고시촌은 어느덧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긋지긋했던 고시촌을 탈출한지도 이제 2년을 넘어서고 있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아직도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각종 시험준비생들이 치열한 시험준비를 하며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고시생들이 모두 꿈을 이루어 고시촌을 탈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고시촌을 떠나는 이들이 더욱 많다. 그리고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간직한 채 떠나는 이들의 빈 공간을 새로운 이들이 채운다.

 신림동 고시촌에 내가 처음 입성한 때는 2002년 겨울이었다. 2002년은 월드컵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웠다. 나 또한 대학에서 월드컵 기간동안 흥분하며 광란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자 현실로 돌아왔다. 

 법대를 나온 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것인가? 취업을 할것인가? 솔직히 대학을 다니면서 사법시험을 몇번 도전했지만 결과는 1차시험에도 떨어졌다. 솔직히 열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떠밀리듯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무엇인가? 내가 갈길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무작정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다. 우선 방을 알아 보아야 했는데 신림9동은 너무나 사람들이 많아 평소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용한 신림2동의 산꼭대기에 있는 조용한 미니원룸에 자리를 잡았다. 

 신림동 고시촌(지금은 대학동으로 변경되었다고 함)은 보통 신림2동과 9동으로 나누어진다. 예전에는 9동에 유명학원들이 몰려 있어 대부분의 고시생들이 신림9동에 몰려 살고 또 편의시설, 복사집등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신림2동에 유명학원들이 옮겨 오면서 독서실, 편의시설도 신림2동에 많이 생겼다.

  내가 선택한 미니원룸은 우선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경치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나즈막한 산이 자리잡고 있어 기분이 울적하거나 하면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름에는 정말 힘들다. 스키장 활강 코스같은  경사로 인해 여름에 학원이나 독서실이라도 나갔다가 복귀할 때에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리고 겨울에 눈이라도 쏟아지면 내려갈 생각을 안하는 것이 속편하다. 굳이 내려갈려면 아이젠이라도 신고 가야 할 정도이다. 그렇게 난 2002년 매서운 바람이 부는 12월 겨울 어느날 신림동 고시촌에 자리를 잡았다.


 딱 3년을 기약했다. 3년이면 충분히 고시촌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능력을 무시한 오만으로 판명되었다. 3년이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신림동 고시촌 생활이 5년이상이 되어 버릴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고시촌의 첫날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잊지 못하는 것 처럼 그날의 기억은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골집을 떠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잠못들며 밤새 뒤척거리던 자취방의 첫경험, 군대입대해서 잠못들며 한숨만 푹푹내쉬던 훈련소에서 첫밤, 마치 고시촌의 첫날은 그런 것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왜 그렇게 매섭게 몰아치던지, 창가를 무서운 소리를 내며 때렸다. 밤하늘은 달빛, 별빛 하나 없어 블랙홀 같은 어둠이 꽉 차있었다. 두꺼운 법서를 책장에 정리고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릴적 추억들, 대학에 입학했던 기억, 부모님, 장래에 대한 고민, 낯선 곳에 있는 어색함 등등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고시촌의 첫날밤은 뒤척거림과 매서운 겨울바람, 한숨으로 무언지 모를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린 소녀의 뺨과 같이 흘러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