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과 풋사랑

이런저런얘기 2010. 12. 30. 10:58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새벽에 폭설이 내렸다. 올들어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 지구온난화 등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눈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온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은 어느덧 아련한 추억을 생각하게 한다.

 새벽에 세상을 뒤덮은 함박눈을 창가에 서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바람에 휫날리던 눈송이는 이리저리 휘날리다, 열어놓은 창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의 손바닥에 안겼다. 그리고 잠시 솜사탕처럼 스르르 녹아 버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눈을 볼때마다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이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풋사랑의 추억이랄까?

 중학교 시절 우리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그중에서 난 피부는 꺼무잡잡하지만 아주 귀여운 소녀를 발견했다. 활달하고 귀여운 소녀, 하지만 난 호감의 표시를 반대로 했다. 아마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고무줄 하는 소녀의 고무줄 끊어놓고 도망가기, 의자 몰래 빼서 넘어 트리기, 도시락에 개구리 넣기 등등 소녀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나의 장난에 소녀는 화가나서 씩씩 거리며, 때로는 울며 나를 잡아먹을 듯 잡으러 다녔고, 난 도망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장난에 화가 나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그렇게 장난을 쳤던 것 같다. 그렇게 소녀에 대한 장난으로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겨울이었다. 시골에 있던 우리학교는 석탄난로를 썼다. 선생님의 명령으로 석탄창고에서 석탄을 가져왔는데, 책상서랍에 예쁜 편지봉투와 선물상자가 있었다. 소녀가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이성으로써 날 좋아한다는 내용;; 선물상자에는 소녀가 곱게 포장한 초콜렛이 있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연애편지에 당황했다. 어릴 적 부터 이성친구에게 장난을 많이 쳤지만, 그런편지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무엇인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가슴은 두근거렸고 또 소녀를 향한 내마음을 들켜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사춘기 소년의 얼굴은 화끈거렸다.

 그리고 한편으로 내 마음을 이해해준 소녀가 고마웠다. 하지만 난 그편지사건이후로 소녀에게 더이상 장난을 칠 수 없었다. 소녀와 마주치면 얼굴을 피했고, 소녀를 볼 때 마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소녀는 계속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해달라 등등 또 인형, 열쇠고리, 직접 접어만든 장미 등 등 정성이 담긴 선물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소녀를 볼때 마다 무언가 화끈거리는 시골소년은 소녀를 피했다. 속으로는 좋아하면서 말이다. 참 그때는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소녀가 이성으로 다가오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한달가량이 흘렀다. 소녀의 구애에 시골소년이 답이없자 소녀는 지쳤던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며칠 몇시까지 버스정류장 앞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와달라는 것이다. 만약 나오지 않는 다면 소녀를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마음을 접겠다는 마지막 통지서였다.

 고민되었다. 버스정류장은 당시 컴퓨터 학원을 다니고 있던 나의 학원 봉고차가 오던 장소인지라 소녀와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소녀에 다가가 나도 너를 좋아해 하고 말하고 싶었는데, 바보같은 시골소년은 버스정류장앞에 귀마개를 하고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소녀를 못본척 하고 학원 봉고차에 올라탔다. 참 바보같은 시골소년이다.

학원차안에서 점점 사라지는 소녀를 바라봤다. 이것으로 소녀와의 추억은 끝이겠구나 했다. 1시간가량이 지나 학원이 끝나고 나오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갔다. 눈때문에 학원 봉고차가 운행을 안해 버스를 탔다.

 하얀 눈을 바라보며 난 소녀를 잊었다.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고, 눈밭에서 축구를 할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에 귀마개를 하고 벙어리장갑을 낀 채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시골소년을 바라보며 소녀는 눈물을 끌썽글썽 거렸다.



 그리고 소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어떻게 넌 그럴 수 있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날 오래동안 바라보고 함박눈 휫날리는 거리로 달려갔다. 휫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소녀는 눈송이와 함께 하얗게 사라져갔다.

 소녀와 시골소년의 풋사랑은 하얗게 내리는 눈송이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싱겁게 끝이났다. 그후로 소녀는 날 바라보지 않았고, 부끄럼많은 시골소년은 더이상 예전처럼 소녀를 대할 수 없었다.

 하얀눈이 소복히 쌓인 아파트 놀이터에 장갑과 두꺼운 점퍼로 무장한 아이녀석 둘이 눈사람을 만들 것인지 눈을 뭉치고 있다. 녀석들에게 눈은 어떤 추억으로 다가올까?

사람은 저마다 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겠지, 난 눈을 볼때마다 소녀와의 어리숙한 풋사랑이 가끔씩 떠오른다.이제 눈은 설레임보다는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골치아픈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더이상 설레임을 느낄 수 없는 서글픈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어릴 적 순수했던 그시절의 설레임이 너무나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