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촌을 쓸쓸히 떠나는 친구에게.......

고시촌이야기 2010. 4. 10. 11:31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이제 봄인가보다
얼마전까지 차갑게 몰아치던 차가운 늦겨울 바람은 이제 더이상 버틸수 없다는듯 사그러 들었다.진해에는 벚꽃이 활짝피었고.개나리는 노란 봄소식을 전해 온다.변호사시보를 하고 있는 법무법인에서 간단히 출근하여 업무를 마치고 집에서 멍때리고 있을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학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녀석이었다.지금도 신림동 고시촌에 시험준비를 하고 있는 녀석이이다.대학때부터 서로 하숙집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이것저것 볼것 못볼것 다본 친한녀석이었다.그러나 운이 좋게 실력도 없는 내가 시험에 먼저 합격하고나서부터 그녀석의 자존심을 건디릴까봐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하는...어설픈 사이가 되어버렸다.

 너무나 반가웠기에 전화벨이 울리자 마자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녀석과 간단한 안부를 나누었다.그리고 녀석은 나에게 말했다.이제 신림동을 떠나야겠다고....;;
나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녀석의 결정을 따를수밖에 없었다. 녀석도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린것일 것이다.그러나 찹찹한 마음은 금할수 없었다.

 녀석은 신림동을 떠나 당분간 강남쪽에 고시원에 있기로 결정했다며 이삿집을 옮겨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나는 알았다고 답했다.그리고 얼마전에 구입한 싸구려 중고승용차를 끌고 신림동을 향해 달려갔다.

 자유로를 따고 달리는 동안 녀석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대학교 입학해서 유난히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와 다가왔던 녀석.그리고 난 녀석과 단짝이 되었다.하숙집에서 같이 라면도 끓여먹고 당시에 유행하던 컴퓨터  게임 '삼국지'에 빠져 같이 수업을 빼먹었던 기억.중간고사에 벼락치기 공부하며 날밤을 지새웠던 기억....신림동 고시촌에서 싸구려 고시식당밥을 먹으면서도 행복해했던 기억........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에 운전을 하니.어느덧 신림동 고시촌에 도착했다.녀석이 있는 곳은 신림9동에 있는 산꼭대기 고시원...다닥다닥 붙어있는 고시원과 간혹 힘겹게 언덕길을 올라가는 사람들...독서실앞에 잠깐 휴식을 취하며 서성거리는 이들....변한것은 없다. 월 15만원에 닭장같은 공간에 그들의 피곤한 몸을 맡긴다....

  녀석이 보였다.차에서 내려 녀석과 반갑게 악수했다.무슨말을 할까.거의 2달만에 보는 녀석인데..특별히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그져 묵묵히 그녀석이 거주했던 고시원방으로 향해 짐을 옮겼다.녀석의 짐은 간촐했다.이미 시험을 더이상 안보기로 결정했는지 돈이 될만한 시험관련책은 헌책방에 모두 팔아버렸다.두꺼운 민법 기본서와 그외 법서 몇권.여름,겨울 구별없는 얇은 이불,옷몇가지...그것이 전부였다.

  녀석의 짐을 차에실고 녀석과 함께 차에 타고 신림동 고시촌을 빠져나왔다.녀석은 아쉬움이 남는듯 창가를 통해 점점 사라져가는 고시촌의 풍경을 바라보았다.여전이 길게 줄이 늘어선 고시학원.다닥다닥붙어있는 각종 미니원룸과.고시원.그리고 독서실...그곳에는 아직도 꿈을 간직한체  많은 이들이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녀석처럼.아쉬움을 간직한체..떠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한참을 달려 녀석이 새롭게 자리잡기로 한 강남의 고시원에 도착했다.녀석은 당분간 이고시원에서 총무로 지내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고 한다.고시원은 신림동의 15만원짜리 고시원보다 훨씬 사정이 안좋아 보였다.공간은 너무 협소했다. 미로같은 방들..누울자리조차 부족해보이는곳....간단히 짐을 정리해놓으니 공간은 더 협소해 보였다.그나마 신림동 고시촌의 고시원이 훨씬 넓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정리를 마치고 녀석과 저녁을 먹었다.지글지글 타오르는 삼겹살...녀석은 쓰디쓴 소주만 연거푸 마신다. 멋진 변호사가 되고 싶어했던 녀석의 어릴적 꿈을 이제 포기하기로 했으니 그 심정이 쓰라릴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다.녀석은 잘모르겠다고 한다. 공기업이나.공무원등을 알아볼까 하는데...그것도 잘모르겠단다.

 녀석에게 로스쿨이라도 응시해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녀석의 경제적 형편을 잘 알고 있기때문에 그것도 권할수 없었다.녀석은 이삿짐을 옮겨줘서 고맙다고 했다.그러나 무엇이 고마운것일까?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인간은 꿈을 먹고 살아가는 동물이기에...하지만 난 녀석이 지금 이 작은 꿈을 포기하지만 보다 원대한 꿈을 이룩할 녀석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착한녀석.너무나 착하고 인간적인 녀석이라는 것을 알기에....

 녀석과 삼겹살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헤어졌다.녀석은 마지막으로 내손을 꼭 잡으며 고맙다고 했다. 무엇이 고마운 걸까? 난 녀석에게 해준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녀석에게 난 무엇인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그러하지 못하고 "다음에 다시 보자"는 무덤덤한 말을 하고 떠났다.



  난 신림동 고시촌에 오래동안 있었지만.그 신림동 고시촌만의 이상한 기운이 싫었다.고시촌의 달은 슬펐다.누군가의 아픈 사연을 집어 삼켜버린듯한 저 밝은 달빛의 우울한 모습...

 녀석이 떠난 자리에는 아마 새로운 고시생이 차지하고 있을것이다. 그러나 반면 녀석처럼 그렇게 그곳을 조용히 아쉬움을 뒤로 한체 떠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슬퍼하지 말자.비록 지금 아쉬움의 발걸음에 저 처량하게 걸린 달처럼 슬프고 가슴아프겠지만..그들에게는 더 밝고 희망찬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친구야.우리 슬퍼하지 말자.지금의 쓰디쓴 상처가 언젠가는 아물어 새로운 희망의 봄을 노래하는 순간이 올것이다.기나긴 춥고 시린 겨울이 있어야만 봄은 소중히 기억될것이다.우리의 인생에 한순간의 실패에 두려워 해서는 안될것이다. 우리는 아직 젊고.해야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