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해가는 고시촌을 지나며

좌충우돌변호사일기 2016. 2. 9. 00:02 Posted by 채희상 변호사

지난 금요일 오후 인천에서 2시간에 걸친 지루한 증인신문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맡기고 서울로 향했다. 무심코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한참을 가던 나는 점점 눈에 익숙해지는 풍경에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그토록 내가 몸부림치며 벋어나고 싶어 했던 신림동 고시촌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나는 5년여 동안 거주하며 처절하게 시험준비를 했던 신림동 고시촌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신림동 고시촌은  항상 탈출하고 싶은 그러나 쉽게 탈출할 수 없던 절망과 한숨의 아물지 않는 상채기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는 찾기 싫었던 신림동 고시촌으로 네비게이션이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그렇게 사법시험 합격 후 처음으로 찾아간 신림동 고시촌의 모습을 차량 창문으로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난한 촌부의 아들이 사법시험에 도전하겠다고 한 것자체가 무리였을지 모른다. 몇년에 걸친 2차시험에서의 낙방은 나를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었고 거주지는 점점 가격이 낮은 신림동 산 끝으로 향했다. 더이상 새책을 살 여력이 되지 않아 헌책방에서 책을 사야했고, 학원 강의는 들을 여력이 되지 않아, 헌책방에서 테입을 사서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테입도 듣자 마자 바로 팔아야 했고 책도 시험이 끝나자 마자 다시 팔아야 했다.

그래도 시험은 계속 떨어졌고, 더이상 독서실비도 낼 여건이 되지 않아, 서울대 도서관에서 1,800원 짜리 식사를 하며 그렇게 버텼다. 하지만 나는 그해 4번째 2차시험에서 또 떨어졌다. 3번째 낙방까지는 무덤덤했다. 하지만 총점에서 3점 차이로 떨어진 4 번 째 낙방은 날 더이상 일어설 수 없게 만든 카운터 펀치 같았다. 그날 고시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고시원 옥상에서 눈물을 흘렸다. 갈 곳을 잃은 아이처럼 난 좌절해야만 했다. 그렇게 신림동 고시촌은 나에게 처절한 아픔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잊으려 했을지 모른다. 끄집어 내면 낼수록 아픈 과거가 들추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우연치 않게 스쳐 지나가는 신림동 고시촌의 모습은 더이상 아픈 상채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아픈 기억도 시간이 흘러가 뒤돌아보면 아름답게 포장되는 추억이 되는가 보다. 20대 후반 젊은 시절을 통채로 바친 고시촌의 모습은 어느덧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고시촌은 쇠락해가고 있었다. 합격자 발표일에 합격자 명단을 붙여 놓아, 수많은 고시생들이 서로의 명단을 확인하며 기쁨의 환호성과 아쉬움이 탄식이 교차하던 상원서적, 쿠폰을 가져가면 책을 할인해주었던 광장서적, 사법시험 2차시험 강의로 유명했던 고시학원 등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 하다. 나의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친 고시촌이 그렇게 쇠락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의 젊은시절 추억의 앨범하나가 날아가버리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